본관은 한산(韓山). 아버지는 이색(李穡)의 7세손인 판서 이증(李增)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당시 곽산군수로 재직하다 호종하였고, 이어 황해도병사에 제수되었다.
1595년(선조 28) 공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삼아 업무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징계되었다가 곧 만포첨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관서지역의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가선대부(嘉善大夫) 자리인 평안도병사로 삼았는데, 남원·무주지역의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부친 이증(李增)의 병환이 깊어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선조는 이경준이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훈련도감대장으로 기복(起復: 상중에는 관직생활을 할 수 없으나 비상시 왕의 명을 받아 관료활동에 나서는 일)하였다.
이어 1601년(선조 34) 경상우도수사 겸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국가의 위급함에도 불구하고 상중의 기복이 인정의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대신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결국 통제사로 파견되었다.
그 뒤 수원부사로 재직시 치적이 도내에서 으뜸이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1606년(선조 39) 평안도병사에 재임용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뒤 충청병사 및 경상도통제사 직무를 수행하였다. 임진년의 공을 포상하려 하였으나 여러 차례 거절하였다. 그 뒤 관직이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