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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개념
회화의 취약점인 일회성을 극복하고 다량 복제로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판에 새겨서 찍은 그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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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회화의 취약점인 일회성을 극복하고 다량 복제로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판에 새겨서 찍은 그림.
내용

조선시대 이전의 전통 판화는 책 앞에 대표적인 장면을 그린 권수 판화(卷首版畫), 책 내용 사이에 삽입되어 내용을 도해한 삽도 판화(揷圖版畫), 그림의 복제를 위하여 별도로 제작된 복제 판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전통 판화는 오늘날 인쇄의 역할을 대신하였고 복제 판화를 제외하고는 설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판화 제체의 예술적 특성을 살려 창작한 작품은 서양 판화가 수용된 20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났다.

전통 판화의 재료로는 목판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간혹 동판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동판화는 오목형의 에칭 기법과는 다르며, 마치 목활자가 마모가 심하여 동활자로 바뀌었듯이 목판화와 같은 볼록형의 판 모양에 판의 재료를 나무 대신 내구성이 강한 동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석판화(石版畫)를 필두로 실크스크린·드라이포인트 등 근대적인 판화 기법이 대거 수용되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전통 판화의 기법은 판에 먹을 묻혀서 찍는 단색 판화가 대부분이다. 채색 판화로는 단색 판화에 색채를 칠하는 가채 판화(加彩版畫)와 여러 색으로 찍은 다색 판화가 있다.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여 채색 판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다.

판화는 화가가 밑그림을 그리고 각수(刻手)가 이를 새기기 때문에 그 예술성은 화가의 화풍과 각수의 표현력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민한 붓의 묘미를 날카롭고 거친 조각도로 표현한 것이 판화이기에 필법에 가깝게 표현하느냐, 아니면 아예 각법의 장점을 살려서 표현하느냐를 선택하는 문제가 판화 양식을 파악하는 관건이 된다.

대개 시대, 지역 그리고 수요 계층에 따라 각기 다른 취향이 나타난다. 서울이나 상류 계층 수요의 판화는 비교적 필법이 강하고, 지방이나 하류 계층 수요의 판화는 각법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필법의 재현은 그 나름대로 기술적으로 더욱 정밀해지고, 각법은 각법 대로 독특한 표현 영역을 확보하게 되는 시대적 추이를 보였다.

그리고 불교 판화와 유교 판화는 대개 교화의 수단으로 제작되어 같은 도상을 번각(飜刻) 또는 복각(復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를 들어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는 중앙에서 제작하여 각 지방에 몇 부를 나누어 주면 각 지방에서는 다시 이를 번각하여 일반백성에게 배포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때문에 같은 시기에 제작된 삼강행실도라 하더라도 번각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또한 이 삼강행실도는 세종판(1434년)을 시작으로 성종판(1490년)·선조판(1579년?)·영조판(1726년?) 등 조선시대 내내 복각하여 같은 도상 속에서도 시대적인 차이를 반영하기도 한다. 따라서 삼강행실도라 하더라도 어느 시대, 어느 지방의 판본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그 판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1) 고려시대

우리 나라 판화의 역사는 고려시대 경판(經板)의 변상도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판화는 인쇄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신라시대에 이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751년 경)과 같은 세계 최고의 목판경이 제작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시대부터 판화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당시의 판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사경(寫經)을 정성껏 제작하여 공덕을 쌓는 일이 성행하였다. 사경은 한 자 한 자 예불을 드리는 정성으로 경을 베끼고 당시로서는 비싼 금분이나 은분을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그 수요는 일부 왕족이나 귀족 계층에 한정되었다. 그리하여 급증하는 수요에 부응하고 보다 값싼 비용으로 제작하기 위해서는 목판경의 등장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즉, 목판경은 사경의 보급판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화는 1007년에 개성의 총지사(摠持寺)에서 제작한 ≪보협인다라니경 寶篋印陀羅尼經≫이다. 이 변상도는 세로 5.4㎝, 가로 10㎝의 소형 판화이다. 작은 화면인 탓인지 간략한 표현으로 일관하고, 다원적(多元的) 구성 방식에 의하여 다른 시간대에 발생한 내용을 한 배경 속에 아무런 구획이 없이 구성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오월판(吳越版, 975년)을 본떠서 제작하였으며, 오월판에 비하여 약간 정세한 점이 다르다.

고려시대 판화의 핵심은 대장경 판화이다. 고려의 대장경은 1087년에 완성한 초조본(初彫本)과 1251년에 완성한 재조본(再彫本)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초조본 대장경 판화로는 성암고서박물관과 일본 난센사(南禪寺)에 소장되어 있는 ≪어제비장전 御製秘藏詮≫이 있다.

이 가운데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권6의 변상도는 승려들이 거대하고 험난한 산들을 넘어서 고승(高僧)을 찾아가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송대(宋代)의 범관(范寬)과 동원(董源) 등의 영향이 엿보이는 거대한 산수 표현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송판(宋版) 대장경을 모본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것에 비하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 판화는 표현 방식에 있어서 다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대방광불화엄경제36권변상주 大方廣佛華嚴經第三十六卷變相周>(13·14세기, 趙炳舜 소장)과 같이 밑그림의 필선을 비교적 충실히 재현한 유려한 표현 방식이다. 이 작품에는 사경과 같은 선묘(線描 : 선으로만 그림)의 장엄이 그대로 살아 있다. 단지 왼쪽의 산만 굵은 각선으로 묘사되었다.

둘째는 해인사 소장의 고려판본과 같이 칼 맛을 살린 각이 진 표현 방식이다. 이 유형의 경판들은 거의 사찰판본으로 관판본과는 달리 거칠고 힘찬 표현이 주조를 이룬다. 해인사고려판본 가운데 <대방광불화엄경권제18변상주 大方廣佛華嚴經卷第十八變相周>(12·13세기)는 변상도 자체의 화려한 장엄의 세계를 역동성이 넘치는 각법으로 표출한 작품으로, 단연 고려시대의 대표작이라 하겠다.

이처럼 굵고 강렬한 각선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조선시대에도 계승되면서 우리 나라 판화의 중요한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된다. 호암미술관 소장 <소자본묘법연화경권제1∼7변상 小字本妙法蓮花經卷第一∼七變相>(1286년)은 들고 다니게 만든 작은 경으로 각법이 거칠다. 이 변상도는 설법 장면만을 배치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사경과는 달리 배경을 장식하는 선묘나 꽃비를 생략하여 여백의 미를 살린 특색을 보인다.

이밖에 고려시대의 판화로 ≪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蜜經≫(1357년,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1378년, 趙明基 소장) 등이 있다.

(2)조선시대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따른 불교 판화가 지속되면서, 새로운 형식과 양식이 서서히 나타났다. 조선시대에는 ≪묘법연화경≫과 ≪부모은중경≫이 가장 많이 제작되었고, 그밖에 ≪금강경≫·≪대방광불화엄경≫·≪아미타경≫·≪관무량수경≫·≪지장보살본원경≫ 등 여러 경전이 간행되었다. 특히 ≪부모은중경≫이 인기를 끈 이유는 이 경전의 핵심내용인 효가 유교국가의 덕목과 상응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복장전적(上院寺木彫文殊童子坐像腹藏典籍)으로 나온 <묘법연화경권제1∼7변상>(1404년)은 고려의 전통을 충실하게 따른 판화이다. 도상은 고려판과 거의 같지만 양식에 있어서 다소 각선의 긴장감이 이완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곧 새 시대에 걸맞는 새 형식이 정립된다.

1405년에 제작된 <묘법연화경권제5∼7변상>(이양재 소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 변상도에서는 석가모니의 설법 장면만 그려지는데, 설법을 듣는 권속들이 대폭 증가하면서 빈틈없이 화면을 꽉 채우는 형식을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화엄경 및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등 다른 종류의 경전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시대 불교 판화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판화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온 것은 역시 유교 판화의 출현이다. 유교 판화는 고려시대 불교 판화의 일색에서 천문·지리·병가·의궤·예술·역학·초상 등 용도가 다양해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유교 판화의 효시는 1434년에 간행된 ≪삼강행실도≫이다. 이 책에 실린 판화는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조선시대의 특색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진주 사람 김화(金禾)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을 계기로 백성들에게 삼강의 덕목을 교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뭇 백성이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각 항목마다 판화를 실었다. 이 판화는 그 설화적 구성이나 각법에 있어서 고려시대 이후의 불교 판화의 전통에 힘입은 바가 크다. 불화에서처럼 다원적 장면이 지그재그의 긴장감 있는 구도로 조합되었다.

요(凹) 공간과 철(凸) 공간, 곡선과 직선, 밀집과 여백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절묘한 공간감을 창출한 점이 돋보인다. 인물 형상은 타원형의 유려한 곡선으로 단아하게 나타내었다. 이는 고려 말 조선 초 불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 판화의 밑그림을 안견(安堅)을 비롯한 궁정의 화원들이 그렸다.

≪삼강행실도≫의 간행을 계기로 조선시대에는 ≪속삼강행실도 續三綱行實圖≫(1515년)·≪이륜행실도 二倫行實圖≫(1518년)·≪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6년)·≪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1797년) 등 행실도류 판화가 계속 제작되었다. 이들 행실도는 당대의 제일가는 화원들과 각수들이 제작한 우수한 작품이다. 이들 판화가 조선시대 유교 판화의 중추를 이루었다.

또한 17세기에는 일본에 전해져 ≪삼강행실도≫를 복각한 ≪화각삼강행실도 和刻三綱行實圖≫가 제작되어 일본 판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있어서 판화의 백미는 단연 1536년에 제작된 소요산본 ≪목련경 目連經≫이다. 이 작품에서는 각법 위주의 표현 방식이 지배하면서 사실적인 묘사는 약화되고 표현성이 강하게 부각되었다. 흑백의 대비가 강하고 추상적이라 할 만큼 형상을 선으로 잘게 분할하고 거친 각법의 묘미를 한껏 살렸다. 이 판화는 전혀 사실적인 미감과는 거리가 멀고 아무런 격식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분방한 표현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주의적 경향은 징광사본(澄光寺本) ≪부모은중경≫(152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소장)·≪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6년)·<형제급난지도 兄弟急亂之圖>(1652년) 등 16·17세기 판화에 공통되는 현상이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임진왜란 직후 인심을 수습하는 방안으로 그 전쟁에 희생된 충신과 열녀를 비롯한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런데 전쟁 직후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급하게 만든 탓인지 표현이 세련되지 못하고 기하학적인 경향이 엿보인다.

또한 <형제급난지도>는 준법이 독특한데, 외곽선을 굵고 구불한 선으로 치고 그 안에는 가는 선으로 마치 수석의 문양처럼 부정형으로 처리하였다. 이처럼 각법의 표현성이 강한 양식은 고려시대 화엄사 고려판본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해 온 것이다. 조선 중기에는 전면적으로 성행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는 조선 중기의 표현주의적 화풍에서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변화하였다. ≪정충록 精忠錄≫(1769년)과 같은 영조조의 작품에서는 각법이 강한 산수의 배경과 유려한 필법을 표현해 낸 인물의 묘사가 조합되어 있다. 이것은 각법 특유의 표현에서 필법적인 표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정조조에는 정교한 기술에 힘입어 당시 화원들 사이에 유행한 김홍도화풍의 사실주의적 화풍이 득세하였다.

특히 사도세자에 대한 효성을 명분으로 시작한 화성(華城)의 건설 과정과 관련하여 용주사본(龍珠寺本) ≪부모은중경≫(1790년), ≪원행을묘정리의궤 園幸乙卯整理儀軌≫(1797년), ≪오륜행실도≫(1797년) 등 일련의 판화가 제작되었다.

≪부모은중경≫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많이 제작된 경전 중의 하나이다. 고려시대의 형식이 다른 경판화와는 달리 조선 전반기에도 큰 변화가 없다가 이 용주사본에 와서 새롭게 달라진 것이다. 이 경전 가운데 <여래정례 如來頂禮>를 보면, 김홍도의 <씨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연상케 한다. 원형 구도에다 주위의 권속들이 대폭 늘어났다.

경전의 내용에 따르면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야 하지만 고려시대본에 석가모니가 뼈 무더기에 목례만 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런데 이 판화에서는 실제 오체투지하는 장면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 사회의 탈권위적인 분위기와 연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오륜행실도≫에서는 ≪삼강행실도≫의 다원적 구성 방식에서 한 화면에 한 장면을 담는 일원적 구성 방식이 정착되었다. 그리고 공간 표현에 있어서 원근에 따른 깊이감이 충실해졌다. 또한 대상이 붓으로 그린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 행사를 기록한 백서이다. 의궤도로는 처음으로 필사가 아닌 판화로 제작되면서 크기도 작아지고 무게도 가벼워지는 등 실용적인 형태로 바뀐 변화를 보였다. 의궤도는 매우 전통성이 강한 분야인데 이처럼 공문서에까지 판화가 사용된다는 사실은 당시 판화의 제작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를 방증하는 것이다.

이 의궤도의 형식은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를 비롯하여 궁중 잔치의 의궤인 진찬의궤(進饌儀軌)·진연의궤(進宴儀軌)·진작의궤(進爵儀軌) 등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말기에는 내용에 있어서 다양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태상감응편도설 太上感應篇圖說≫(1852년)·≪텬로력뎡≫(1896년)·≪회상영적실기 繪像靈蹟實記≫(1915년) 등 도교·기독교·천도교 등 조선 말기에 성행한 종교 서적의 삽화로 판화가 활용되었다. 그리고 ≪대방초간독 大方草簡牘≫(1921년)·≪해강난죽보 海岡蘭竹譜≫와 같은 화보류(畫譜類)도 발간되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는 시전지(詩箋紙)·일반 회화·민화(民畫) 등 판화가 생활 미술로 확산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는 많지는 않지만 다색 판화가 시도되었다.

20세기를 전후하여 석판 기법의 수용을 계기로 전통적인 목판화는 서양의 판화에 밀려 사라지게 되었다. 1980년 전후로 미술의 대중화를 표방하여 목판화 운동이 일어나는데, 민주화 운동과 같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면서 보다 강렬한 표현 방식을 보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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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판화의 연구」 1(장충식, 『불교학보』 19, 동국대학교불교문화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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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판화의 특성과 미술사적 의의」(유홍준·이태호, 『조선의 고판화』, 한국출판무역주식회사. 1992)
「조선 전반기 불경판화의 연구」(박도화, 동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7)
「삼강행실도 판화에 대한 고찰」(정병모, 『진단학보』 85, 1998)
집필자
장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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