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이 아닌 관리나 양반 사족(士族)을 조사할 때 신장(訊杖 : 고문용 형장) 같은 형구를 쓰지 않고 구두로 묻고 답변하는 것을 말한다. 평문의 반대는 고문(拷問 : 고신이라고도 함.)이다.
『경국대전』 형전(刑典)의 고신조(拷訊條)를 보면 관리나 공신·왕족 등을 제외한 일반 서민에 대한 범죄조사는 고신이라 하여 무조건 신장으로 때리면서 고문해 자백을 받게 되어 있었다.
추국(推鞫 : 의금부의 형문) 중일 때 죄인의 나이가 70세가 넘었다든가 고문에 시달려 형장을 계속하면 죽을 가능성이 있을 때는 고신을 보류하고 평문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1613년(광해군 5) 7월 4일조에 추국청(推鞫廳)의 계문에서 “……지난날 역시 계청하여 구문(句問)을 했으나 나이 70세가 넘은 사람이기 때문에 형세가 형신하기 어려워 평문으로 다스렸으나 그는 역시 자백에 불응하였다.”는 기사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또한 관리들의 가벼운 불법행위는 공함답통(公緘答通 : 서면으로 심문을 대신함.)이라 하여 서면으로도 문답이 허락되었다. 즉 평문의 형태로서 문서로 하는 ‘평답’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반역죄나 범상부도죄(犯上不道罪)가 아닌 이상 관리계층과 사족계층은 평문·평답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양반사회였던 것이다.
『속대전』 형전 추단항(推斷項)에 “상민과 천민으로 과거에 합격한 자가 죄를 범하면 평문하여 자백하지 않을 때는 형조에서 계품하고 형장으로 고문하며,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상민·양반을 가리지 않고 관찰사가 즉시 형추한다.”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과거에 합격한 자라도 상천(常賤 : 상민·평민)과 외방의 사족(士族 : 낙향한 사족은 평민 취급)은 평문의 특권을 갖지 못한다는 취지이다. 그러므로 평문의 특권은 현직관리나 권력계층에 있는 서울양반이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