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특별히 큰 수레로 대차(大車)가 있고, 작은 물건을 싣는 데에는 동차(童車)·썰매〔雪馬〕 등이 이용되었으며, 중간 정도의 물건을 실어나르는 데에 평차가 이용되었다.
대개 길이는 12척(尺) 5촌(寸) 정도, 너비는 4척 4촌 정도이며 바퀴는 지름이 3척 5촌 정도이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하면 조선 후기 수원성곽공사 때에는 평차를 새로 17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때는 특히 바퀴를 낮게 하여 짐싣기 쉽게 하였고 견고하게 고안하였다.
평차는 중간 크기의 돌, 누주(樓柱: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길이 22척, 말원경 1척 5촌 규격의 목재) 등의 재목을 나르는 데 썼으며, 많으면 소 10∼11마리, 적으면 4,5마리가 끌었다. 『북학의(北學議)』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실학파 학자들은 당시의 중국의 수레에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수레는 비실용적이라고 보았다.
즉, 수레 자체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그 크기나 규격이 통일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수원성곽공사에는 실학자들의 영향으로 평차를 개조하여 유형차(遊衡車)라는 가볍고 짐싣기 편한 수레를 고안하여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