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 ()

조선시대사
유적
문화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이인좌의 난 때 순절한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 3인의 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이칭
이칭
삼충사(三忠祠)
유적/건물
건축 양식
사당
건립 시기
1731년(영조7)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3칸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충청북도
종목
충청북도 시도기념물(1977년 12월 06일 지정)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로53번길 9 (수동, 표충사)
내용 요약

표충사(表忠祠)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이인좌의 난 때 순절한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 3인의 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일명 삼충사(三忠祠)라고도 한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폐지되지 않은 사당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조선시대 충효열 사상과 정표 정책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이인좌의 난 때 순절한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 3인의 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건립경위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청주가 함락되면서 충청도 주1 이봉상(李鳳祥), 주2 남연년(南延年), 주3 홍림(洪霖) 등이 대항하다가 순절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는 이봉상을 주4으로 추증하고 충민공(忠愍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남연년에게는 주5를 증직하고 충장공(忠壯公)의 시호를 내렸으며, 홍림에게는 주6을 증직하고 그 마을에 주7하였다.

1731년(영조 7)에는 세 명의 충신들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건립하고 삼충사(三忠祠)라고 하였으며, 1736년(영조 12) 호서어사(湖西御史) 오원(吳瑗)이 표충사(表忠祠)로 사액을 받았다. 이후 1814년(순조 14)에는 홍림의 방기(房妓) 해월(海月)이 열녀로 정표되었고, 홍림은 1871년(고종 8)에 충강공(忠剛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변천

표충사는 처음에 청주읍성 북문 안쪽에 세워졌으며, 이봉상과 남연년을 병향(並享)하고, 홍림은 주8하였다. 주9의 서원철폐령 때도 폐지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1939년 도시계획에 의해 우암산 기슭으로 이건하였다.

형태와 특징

표충사는 경사지에 자리하여 중심축 선상에 여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표충사 주10가 있고 주11인 삼충사문(三忠祠門)과 재실의 기능을 지닌 수풍정(樹風亭) 등 부속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삼충사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쪽에 표충사 이건사실비가 서 있다. 사당 영역은 내삼문과 담장으로 인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 한쪽에는 삼충사 사적비와 해월(海月)의 열녀각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잘 다듬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 옆면 3칸 규모의 겹처마 주12으로 표충사(表忠祠)라는 편액을 달았다. 주13는 2익공 형식이며, 정면의 벽체와 창호 모두 널판을 사용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측면과 배면의 벽체는 하부를 방화벽으로 구성하였다. 작은 규모의 단순한 건물이지만 비교적 격식을 잘 갖춘 건물이다.

의의 및 평가

표충사는 조선시대 충효열 사상과 정표 정책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폐지되지 않고 유지된 주14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원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기타 자료

『삼충사비명(三忠祠碑銘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이품의 무관 벼슬. 세조 12년(1466)에 병마도절제사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2

탁월한 군사적 지도자.    우리말샘

주3

조선 시대에, 감사(監司)ㆍ유수(留守)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견외 사신(使臣)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 벼슬.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의정부에 속하여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일반 정사(政事)의 처리, 국토 계획, 외교 따위를 맡아 하던 종일품 벼슬.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둔, 병조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이품으로, 군사와 국방에 관한 일을 총괄하였다.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호조에 속한 종이품 벼슬. 참의와 함께 판서를 보좌하였다.    우리말샘

주7

착한 행실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    우리말샘

주8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우리말샘

주9

조선 고종 때의 정치가(1820~1898). 이름은 이하응(李昰應). 호는 석파(石坡). 고종의 아버지로, 아들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하여,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눌러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따위의 내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한편으로는 경복궁의 중건, 천주교에 대한 탄압, 통상 수교의 거부 정책을 고수하여 사회ㆍ경제적인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우리말샘

주10

사원이나 향교 따위의 뜰에 세운 비석.    우리말샘

주11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 좌우의 행랑채보다 기둥을 훨씬 높이어 우뚝 솟게 짓는다.    우리말샘

주12

박공지붕으로 된 집.    우리말샘

주13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우리말샘

주14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집.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