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진(震). 자는 춘경(春卿). 아버지는 첨절제사 홍수명(洪受命)이다.
1727년(영조 3) 충청도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에 의하여 청백함이 인정되어 막료가 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청주성이 함락되고 이봉상이 잡힌 다음 죽음을 당하자 그는 자신이 절도사라 하며 반란군을 꾸짖었다.
반란군은 그를 충신이라 칭찬하고 후일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겠다고 하자, “나는 아들도 없거니와 있다 하여도 너희 같은 역적놈의 부하로 쓰이게 할 수는 없다.” 하고 죽었다.
뒤에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1729년 6월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청주기(淸州妓)가 낳은 그의 아들이 면천(免賤)되고, 7월에 예조의 계(啓)에 따라 증직, 정려되었다.
1742년 검토관 이성중(李成中)이 청주를 지나다가 그 곳 사람들이 홍림의 충의에 대하여 칭찬하는 것을 듣고 왕에게 아뢰어 그의 처에게 늠료(廩料: 녹봉으로 주는 쌀)가 하사되었으며,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특혜를 베풀어 그 충절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