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00년대에 이미 탈놀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시작 시기를 그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마을은 충무시에 있었던 삼도수군통제사영의 선봉아문(先鋒衙門)인 진(鎭)이었던 곳으로, 초기에는 진의 이속 및 군병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오광대를 놀았다고 한다.
해마다 음력 정초에 동제를 지내고 매구패(農樂隊)가 동제를 지낸 순서대로 당산(堂山)·당(堂)·진터·샘·다리·갯가·거리(洞口) 등으로 돌면서 고사를 지낸 뒤, 저녁에 동사(洞舍) 앞마당에서 오광대 공연을 하였다.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풍어를 위하여 해마다 놀던 오광대는 1930년대 일제가 금하여 동제와 함께 폐지되었다.
놀이내용은 생존하고 있는 연희자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마을노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말뚝이가 양반을 풍자하는 장면, 큰 각시가 오줌을 눌 때에 키로 부치는 장면, 상여가 출상하는 장면 등이 현재의 「통영오광대(統營五廣大)」와 비슷하다는 것으로 보아서 같은 계통의 탈놀음인 것 같다.
놀이에 쓰이는 가면은 양반·말뚝이·홍보(紅白假)·곰보·검정탈·큰각시(할미)·작은각시·할미양반·조리중·상좌·봉사·상주·사자·포수·문둥이 등인데, 몇몇 바가지 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두꺼운 백지에 그림을 그려서 만든 평면지 가면이었다.
음악은 꽹과리·징·장구·북 등 농악기로 굿거리장단을 치고 춤은 이 장단에 따라 덧뵈기춤을 추었다. 역대 기능보유자로는 장희필(張熺弼, 말뚝이·문둥이)·정작지(鄭作支, 양반·할미양반)·김종관(金鍾觀, 홍보)·김종원(金鍾原, 큰각시·사자)·강태문(姜泰紋, 작은각시)·장윤이(張允伊, 조리중)·이학련(李學連, 포수)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