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밀약은 갑신정변 후부터 영국의 거문도 철수 때까지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 협약이다. 갑신정변 이후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구축하기 위해 고종의 밀명으로 묄렌도르프가 주일러시아공사와 접촉하였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와 부동항 조차를 협의하였고, 고종이 승인하여 제1차 밀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청나라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이 증대되자 친로파 김광훈 등을 다시 등용하여 러시아공사관과 접촉하여 제2차 한로밀약을 체결하였다. 이홍장이 이 사건에 대해 조회하자 러시아 정부가 부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1884년(고종 21) 베트남분쟁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프랑스의 관계가 악화되어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전념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이를 조선 침략의 호기로 이용해 대조선정책을 적극화하였다. 그리하여 12월 4일에 일어난 개화당의 갑신정변을 지원했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을 둘러싼 청 · 일 양국 간의 대립은 다시 표면화하였다. 조선은 외교고문과 군사고문의 파견을 지연한 미국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청나라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자적 외교노선을 구축해야 했다.
이에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와 함께 러시아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1884년 12월에 권동수(權東壽)와 김용원(金鏞元)을 블라디보스토크에 보내어 그 곳의 러시아 관헌과 접촉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5년 1월초 묄렌도르프로 하여금 러시아의 훈령에 따라 내한한 주일러시아공사관 서기관 스페에르(Speyer, A. de.)와 협의하게 하였다. 스페에르와의 협의 과정에서 묄렌도르프는 러시아의 조선 보호를 요청하였다. 그 대가로 부동항인 영흥만이나 동해안의 다른 항구 하나를 조차(租借)할 것을 제의하였다. 스페에르는 이 제의를 주일러시아공사 다비도프(Davidoff)에게 전달하였다.
그런데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이 체결되어 조선에 주둔한 청 · 일군대의 철수가 분명하게 되었다. 그러자 묄렌도르프는 러시아에 군사교관 요청 문제를 의뢰하려 하였다. 묄렌도르프는 국왕의 밀명을 띠고 갑신정변의 사과사절로 동경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해 2월 16일 다비도프와 접촉하였다. 이때 러시아 군사교관의 파견과 아울러 청 · 일 양국이 조선에서 충돌할 때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다비도프공사가 영흥만의 조차를 조건으로 응해서 협의는 무르익었다. 3월 5일 묄렌도르프는 서울에 도착해 고종에게 동경 협의의 승인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한로밀약이다.
제1차 한로밀약으로 러시아는 숙원이었던 조선 반도에서의 부동항 획득을 달성하여 영국과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교관의 파견을 통해 조선의 내정까지 간여할 수 있는 기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한로밀약은 영국과 일본에서 중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즉, 일본은 청나라보다 강대한 러시아의 위협을 절감하여 1885년 4월 18일 청나라와의 톈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인해 이미 러시아와 전쟁을 각오하고 있던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톈진조약 내에 청나라의 대조선 종주권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영국의 거문도 점령(4월 15일)으로 인해 한로밀약을 실현할 수 없게 된 러시아의 상황을 고려하면,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보다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따라서, 러시아와 일본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고 청나라 역시 불만을 표시하였다.
6월 20일경 영국은 조선에 애스톤(Aston, W. G.)을 파견하여 거문도 임대교섭을 추진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스페에르 서기관을 재차 서울에 파견해 영국의 교섭에 대한 방해공작을 시도하였다. 이때 조선의 외부는 이미 묄렌도르프가 한 대로제의(對露提議)를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스페에르는 외부에 위협, 경고를 하기까지 하였다. 일본 역시 이 기회를 이용해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에게 조선에 대한 공동후견제를 제의하는 등 조선을 둘러싼 사태는 점점 복잡해갔다.
이홍장은 다방면의 차선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묄렌도르프를 해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미국인 메릴(Merrill, H. F.)을 조선의 해관총세무사(海關總稅務司)에, 그리고 데니(Denny, O. N.)를 외교고문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구치되어 있던 흥선대원군을 방면하고 1885년 10월 3일 새로이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에 임명된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서울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이홍장의 강경책은 한로밀약 사건으로 러시아를 경계하고 있는 일본이 청나라의 대조선 종주권 강화정책을 묵인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더욱 용이하게 진해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이홍장은 1885년 10월경부터 영국함대의 거문도 철수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시작하였다. 영국은 거문도가 장차 타국에 의해 점령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철수할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1885년 12월을 전후해 아프가니스탄 분쟁이 일단락되고 러시아와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이에 따라 영국은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면서 거문도 철수를 고려하였다. 영국은 거문도 철수를 위한 선행 조건으로서 거문도에 대한 타국의 불점령 보장을 청나라에 요구하였다.
이러한 보장책을 마련하기 위해 이홍장은 주청러시아대리공사 라디겐스키(Ladygensky)를 톈진으로 불러 수차 회담하였다. 결국 라디겐스키에게 “러시아는 거문도를 비롯한 한국령의 어느 부분도 차지할 생각이 없다.”고 구두 서약하게 하였다. 마침내 조선과 청나라간의 기존관계 유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홍장-라디겐스키협정이 1886년 10월에 성립되었다. 러 · 청간의 구두 협정은 지체 없이 영국에 전달되었다. 10월 31일 청나라가 타국의 거문도 불점령 보장을 정식으로 영국에게 제시하자 영국 해군은 1887년 2월 27일에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홍장-라디겐스키회담에서는 거문도 철수를 위한 조선의 영토보장 문제 이외에 이른바 제2차 한로밀약사건에 대한 신랄한 추궁과 응수가 오고갔다. 여기서 논란이 된 제2차 한로밀약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제1차 한로밀약 이후 청나라의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이 증대되고 위안스카이의 권한이 커지자 조선 내에서는 저항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서울에 부임할 때, 서울에 도착한 러시아의 베베르 대리공사는 궁정을 자주 출입하면서 명성황후 계열 및 친로파와 긴밀한 접촉을 가졌다.
한편, 조선 정부는 한로밀약사건으로 유배된 친로파 김광훈(金光勳) 등을 다시 등용하는 등 러시아공사관과의 접촉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로 제2차 한로밀약이 체결되었다는 설이 생기게 되었다. 즉, 1886년 8월 13일에 위안스카이는 ‘러시아의 개입을 호소한 고종의 밀서’라는 것을 이홍장에게 전보로 보고하였다. 밀서의 요지는 “조선은 자주독립국인데도 타국의 압력을 받고 있다. 지금 우리 대군주는 나라의 진흥에 힘써 영구히 타국의 구속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이에 혹 타국이 반대할 경우 귀정부에 보고하면 우리나라를 극력 보호하고 병선을 파견해 상조하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에 의하면, 그 문서는 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이 베베르공사에게 보낸 고종의 서한으로서 민영익(閔泳翊)을 통해 입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로밀약은 진위가 불분명한 바가 있었다. 이에 이홍장이 주청러시아공사에게 이 사건에 대해 조회하자, 러시아 정부로부터 한로밀약은 사실무근이며 그러한 고종의 밀서를 접수한 사실도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8월 16일). 이홍장은 러시아 측의 해명을 받은 뒤 이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안스카이와 이홍장은 한때 조선을 병합할 계획까지 가졌었다. 이러한 병합 기도는 결국 실패했으나 제2차 밀약사건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이 얼마나 극에 달하고 있었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영국해군을 거문도에서 철수시키고 제2차 한로밀약사건을 처리한 후 청나라의 조선에서의 입장은 러시아가 무시하지 않는 한 영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톈진조약 이후 사실상 청나라를 견제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 일본이 일시 조선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 청나라는 더욱 조선 종주권강화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