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온(汝溫). 한지원(韓智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구(韓聖龜)이고, 아버지는 한배후(韓配厚)이며, 어머니는 이창령(李昌岭)의 딸이다. 한배연(韓配淵)에게 입양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벼슬길로 나아가 1740년(영조 16) 정선군수를 거쳐 정랑에 올랐다. 1754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60세의 나이로 보덕이 되었고, 이어 지평·정언·헌납·장령을 역임하였다.
강릉부사로 재직중이던 1756년 관동지방에 대기근이 들자 녹봉에서 구휼미를 내는 등 정성스레 힘을 다하여 진휼에 힘써 수천명의 굶주린 백성을 구하였으며, 그 치적을 인정받아 동부승지가 되었다.
1763년 대사간에 올랐고,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불참하였다 하여 원주목(原州牧)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나 다시 대사간에 특수(特授)되었고,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
이어 한성판윤을 거쳐 8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는 등 영조로부터 우로(優老)의 은전을 입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