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 할아버지는 호부상서(戶部尙書) 한공의(韓公義)이고, 아버지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한수(韓脩)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권적(權適)의 딸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한상경(韓尙敬)이 그의 아우이고, 세조 때 공신 한명회(韓明澮)는 그의 손자이다.
1374년(공민왕 23) 대군시학(大君侍學)을 지냈다. 그리고 1380년(우왕 6)에 좌랑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양왕 때는 형조판서를 거쳐, 우부대언·우상시(右常侍)·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6월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속임을 변명하고 돌아와, 12월에 서북면도관찰출척사 겸 병마도절제사(西北面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를 지냈다.
1392년 7월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2월에 돌아왔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기로(耆老)와 백관(百官)이 도당(都堂)에 모여 국호를 의논할 때 거론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단군·기자·위만의 세 조선을 상징하는 ‘조선’으로 압축되었다.
명나라는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칭호를 새 왕조의 국호로 선정했으나, 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 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로 추천한 것이었다.
그것은 국호를 제정하기 이전인 1392년(태조 1) 8월에 이미 단군을 동방의 첫 수명군주(受命君主: 命을 받은 군주)로서 국가에서 평양부로 해금 시제(時祭)를 지내도록 조처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1393년 9월 양광도관찰출척사(楊廣道觀察黜陟使)가 되고, 1397년 경상도관찰출척사를 거쳐, 그 해 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었다. 성품이 총민(聰敏)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많이 쌓았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