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출신이다. 1269년(원종 10) 집정자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동생 안경공 왕창(安慶公 王淐)을 왕으로 세우자, 최탄(崔坦) 등과 함께 임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삼화현(三和縣)의 교위(校尉) 이연령(李延齡), 정원도호부(定遠都護府)의 낭장 계문비(桂文庇), 연주인(延州人) 현효철(玄孝哲)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용강·함종·삼화 등지의 백성을 모아 먼저 함종 현령을 죽이고 밤에 가도(椵島)에 있는 병마사영을 기습한 다음 북계(北界)지역을 석권하였다. 이듬해 서경을 비롯한 북계 54성과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6성을 들어 몽고에 투항하니, 몽고가 이곳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천호(千戶)에 임명하였다.
그 뒤 동녕부의 총관(摠管)을 지내고 1290년(충렬왕 16) 동녕부가 폐지되면서 몽고의 비호를 받아 대장군이 되고, 같은 해 원나라의 반적 합단(哈丹)이 동북변에 침입하자 서경의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305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임명되어 왕을 따라 몽고에 들어갔는데 왕유소(王維紹)와 함께 충선왕을 참소하다가 1307년 세자(충선왕)에게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