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단의 침입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몽골 제국의 반적(叛賊)인 합단(哈丹, 카단)이 고려에 침입한 사건이다. 몽골 제국의 동북쪽, 요동 일대에 세력을 두고 있었던 합단은 1290년(충렬왕 16)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패전한 후 한반도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현재의 함경도 일대를 함락하고 철령(鐵嶺)을 넘어 강원도 일대를 약탈한 후 충청도 일대에 집결하였다. 1291년(충렬왕 17) 5월, 몽골 조정에서 파견한 지원군과 함께 고려군은 이들을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일대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합단적은 함경도 일대를 거쳐 퇴각하였다.
합단(哈丹, 카단)은 몽골 제국 칭기즈칸의 동생이 이끈 카치운 왕가(王家)의 제왕(諸王)이었다. 1287년(충렬왕 13)에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인 옷치긴의 후손이자 요동 일대를 근거로 하고 있던 내안(乃顔, 나얀)이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진압한 끝에 내안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합단은 1290년(충렬왕 16)에 요동 일대에서 몽골 제국의 진압군과 대항하였다. 합단군은 현재의 지린성[吉林省] 일대를 떠돌다가 몽골 제국의 장수 내만대(乃蠻帶, 나이만다이)에게 패배한 후 두만강을 건너 고려 동북면을 침입하였다.
합단 세력이 침입해 오자 고려는 적이 침공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에 수비 병력을 배치하며, 동시에 몽골 조정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합단은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반란군이었으므로 몽골 제국에서도 구원군을 파견하여, 1290년 연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몽골군 2만 3,000여 명이 고려에 진입하였다. 한편 고려 정부는 1290년 12월에 강화도로 피신하고, 전국의 주현(州縣)에 영을 내려 산성과 섬으로 피난하게 하였다. 이 무렵 합단 세력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을 대부분 함락하였다.
1291년(충렬왕 17)에 합단적은 철령을 넘어 고려의 교주도(交州道: 강원도)에 들어왔다. 그들은 곧이어 양근(楊根: 지금의 경기도 양평)을 점령하고, 원주의 치악성(雉嶽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원주별초(原州別抄) 소속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冲甲)을 비롯한 이들이 힘써 싸워 적을 물리쳤다. 원주에서 패배한 합단적은 주력을 충주로 돌리고, 일부는 개성 부근에까지 출몰하였다. 그들은 충주산성을 공격했으나, 다시 손해를 입고 남하하여 연기(燕岐)에 집결하였다. 이때 몽골 조정의 군대와 고려의 삼군(三軍)은 목주(木州: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에 집결해 있었다. 1291년 5월, 연합군은 합단적을 추격해서 연기의 정좌산(正左山)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지는 전투에서도 연달아 합단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고려의 한희유(韓希愈)를 비롯한 장수가 크게 활약하였다. 이에 합단은 그의 아들 노적(老的: 라오디)와 함께 2천여 기(騎)를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뒤이어 합단의 후속 부대 3천여 기가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交州: 지금의 강원도 회양)까지 들어왔으나, 본군(本軍)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철령을 넘어 달아났다. 이로써 합단적의 침입은 1년 반 만에 평정되었고, 충렬왕도 강화에서 환도하였다.
합단적의 침입은 몽골 제국 내부에서 일어났던 갈등의 여파가 한반도 내부까지 미친 사건이었다. 고려는 몽골 조정의 지원을 받아 이 침입을 격파하였다. 충렬왕과 그 후대의 국왕들은 이 사건을 고려가 몽골 황실을 위해 공을 세운 일로 여러 차례 거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