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유서』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기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55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12권 3책으로 편찬된 필사본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기는 애국계몽운동기에 사회개혁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발표하였다. 전제(田制)를 비롯한 다양한 제도 개혁에 대한 진보적인 내용이 수록되었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미려하고 논지가 일관성 있게 서술되어 한말의 정치·경제·사상·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전하는 필사본 『해학유고』를 저본으로 산정(刪定)하여 간행했지만 그 내용 일부가 누락되어 『해학유고』보다 미비하다고 평가된다.
이기의 저술 활동은 과거를 포기하고 20여 년에 걸친 유력생활(遊歷生活)을 청산하고부터 내수외양책(內修外攘策)을 주창, 사회개혁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애국계몽운동기에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평소 시문짓기를 즐겨하지 않고 글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기의 저술은 수합되지 못하고 대부분 산일된 채 방치된 상태에서 상당수가 현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 『해학유서』는 이기 저술의 최초의 출간본이자 유일한 단행본인 것이다.
권1은 전제망언(田制妄言)으로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문제점을 논하고 개혁할 점을 지적하였고, 권2는 급무팔제의(急務八制議)로서 국제(國制) · 관제(官制) · 전선제(銓選制) · 지방제(地方制) · 전제(田制) · 호역제(戶役制) · 잡세제(雜稅制) · 학제(學制) 등 시급히 개혁해야 할 여러 가지 제도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권3에 문록(文錄, 論辨), 권4에 소주문(疏奏文), 권5·6에 서간문(書簡文), 권7에 서(序) · 발(跋), 권8에 기(記), 권9에 전(傳) · 잡저(雜著), 권10에 부(賦), 권11·12에 시(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 외에도 『귀독오서집(歸讀吾書集)』 · 『질재고(質齋稿)』 · 『선여집(燹餘集)』 · 『해학유고(海鶴遺稿)』 · 『신어(新語)』 등의 저술과, 『대한자강회월보』 · 『호남학보』 · 『 조양보(朝陽報)』 · 『야뢰보(夜雷報)』 등 잡지에 기고한 글이 상당수에 달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대한 저술이 시문류보다 사회개혁 · 애국계몽운동 관계의 글이 대부분인 것은 그의 학문이 실학적 경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학유서』가 보다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기의 글을 모은 최초의 문집은 『귀독오서집』이라 알려져 있다. 1892년( 고종 29) 그동안의 유력 생활을 마치고 정착하기 위해 서재를 ‘귀독오서재’라 이름 짓고, 자신의 글을 모아 『귀독오서집』이라 명명했다는 것이다.
한편, 1894년 은둔생활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거처할 집을 마련하여 ‘질재(質齋)’라 명명하고, 이건창(李建昌)의 「질재기(質齋記)」를 받아 편집한 『질재고』는 별도의 문집인데, 이 모두는 갑오농민전쟁 기간 동안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뒤 자식 등이 눈에 띄는 대로 베껴서 겨우 몇 권을 얻게 되어, 이를 별도로 『선여집』이라 하였다. 『선여집』과 그 이후 수집된 원고를 합쳐 필사본으로 만든 『해학유고』가 현전하고 있다.
그런데 『해학유서』는 『해학유고』를 산정(刪定)한 것이지만, 『해학유서』의 모든 글은 『해학유고』에 실려 있고, 『해학유고』 소재의 「진교태백경(眞敎太白經)」과 시 59수 및 문(文) 25편이 『해학유서』에서는 탈락되었다. 요컨대 『해학유서』는 『해학유고』를 저본으로 하여 간행하였으되, 『해학유고』보다 도리어 미비한 셈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문장이 미려하고 논지가 일관성 있게 애국계몽적 성격을 띠며 진보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일반 문집과는 달리 한말의 정치 · 경제 · 사상 ·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