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사당 ()

목차
관련 정보
향사당
향사당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향촌자치기구로서 이용된 청사.
목차
정의
조선시대 향촌자치기구로서 이용된 청사.
내용

향당(鄕黨)의 나이 많은 어른들이 모여서 향중(鄕中)의 여러 일들을 의논하거나 향사(鄕射 : 향원들이 서로 편을 갈라 활쏘기 재주를 겨루는 의식)·독법(讀法 : 향민을 모아 놓고 법령을 읽어 알리는 의식)을 하며 향안(鄕案)을 보관하고 삼향임(三鄕任 : 좌수·좌별감·우별감)이 상시근무하던 청사이다.

향사당(鄕社堂)·향서당(鄕序堂)·집헌당(執憲堂)·풍헌당(風憲堂)·향헌당(鄕憲堂)·회로당(會老堂) 등으로도 불렸다. 처음에는 유향소(留鄕所)로서 기능을 하였으나, 1475년(성종 6) 유향소가 다시 설립될 때,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풍속을 교화하되, 특히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는 데 제일인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는 유향소’라는 뜻으로 향사당이라 개칭되었다.

사(射)는 공자가 “확상(矍相 : 땅이름)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을 얻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고대 현군들은 몸소 인의(仁義)를 실행하여 백성을 인도한 것을 모방하였다.

향사당은 처음에 관아에서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일향부로(一鄕父老)의 힘과 관아의 후원으로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후에는 대체로 향부로들의 출자에 의하여 재건되면서 그 위치도 관아 구내로 이전되었다. 규모는 대개 5∼20칸 내외였고, 지방에 따라서는 주방까지 마련된 곳도 있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향청(鄕廳)연구」(김용덕, 『한국연구총서」 36, 한국연구원, 1978)
「조선전기 안동부재지사족(安東府在地士族)의 향촌지배」(정진영, 『대구사학』 27, 1985)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신정희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