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제생집성방』을 만들게 된 경위에 대하여 『양촌집(陽村集)』권17에 당시의 석학인 권근(權近)이 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문·발문에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국토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물을 얻기 어렵다. 나라의 풍속에 간간이 일초(一草)로써 일병(一病)을 치료하여 효력을 보았다. 일찍이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이 있었으나 너무 간략하였다.
이제 판문하(判門下) 권중화가 서찬(徐贊)에게 명령하여 『간이방(簡易方)』을 저술하게 하였는데 세간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태조가 개국한 다음 널리 백성들을 구제할[博施濟衆]할 뜻으로 궁민(窮民)들이 병에 의약을 얻지 못하는 것을 측연히 생각하여 오던 차에 좌정승 평양백(左政丞平壤伯) 조준과 우정승 상락백(右政丞上絡伯) 김사형이 태조의 마음을 헤아려 제생원을 두기를 청하고, 중추(中樞) 김희선을 시켜 향약을 채취하여 민질(民疾)을 널리 고치게 하였다.
또 각 도에 의학원(醫學院)을 두어 교수를 보내어 질병을 치료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관약국관(官藥局官)에게 특명을 내려 여러 가지 약방문을 검토하게 하고, 우리 나라에서 얻은 경험방(東人經驗方)을 채집하여 그 종류에 따라서 문(門)으로 나누어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집하고, 끝에 우마의방(牛馬醫方)을 덧붙여 김희선이 관찰사로 재직 중인 강원도에서 간행된 것이다.”
이어서 이 책의 성립에 공헌을 한 조준·김사형·김희선·권중화 네 사람의 공적을 찬양하고, 자국풍토(自國風土)에서 생산되는 약제로써 자국민의 질병을 구료하기를 강조하였고, 이를 위하여 이와 같은 방대한 책이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의약서(醫藥書). 『향약제생집성방』 총 30권 가운데 제6권으로 1399년(정종 1) 김희선이 강원도에서 간행된 것이다.
이 책은 망실되어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세종 때 발간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과 『향약제생집성방』에서 388증(症)과 2,803방(方)을 인용하였다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