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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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조선 순조와 순원왕후 인릉 전경
서울 조선 순조와 순원왕후 인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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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는 조선시대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인 헌릉과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무덤인 인릉을 통칭한 능호를 지칭하는 용어.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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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있는 조선시대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인 헌릉과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무덤인 인릉을 통칭한 능호를 지칭하는 용어. 사적.
개설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인 헌릉과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무덤인 인릉을 합쳐 부르는 명칭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다. 두 능의 면적은 41만 1014평으로, 이 일대가 1970년 5월 26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내용

헌릉(獻陵)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능이다. 능은 건좌손향(乾坐巽向)의 동원쌍봉(同原雙封)으로 이루어졌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함흥 귀주동(歸州洞)에서 탄생하였다. 조선왕조의 개국에 큰공을 세웠으며,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일으킨 뒤 1400년(태종 즉위)에 왕위에 올랐다. 1422년(세종 4) 5월 10일에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에서 56세로 승하한 후 같은 해 9월 6일에 원경왕후 옆에 묻혔다.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딸이다. 1365년(공민왕 14)에 개성의 철동(鐵洞)에서 태어나 태조 즉위 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1400년(태종 즉위) 정빈(貞嬪)에 책봉되고 정비(靜妃)에 진봉되었다. 1420년(세종 2) 7월 10일 수강궁(壽康宮: 창경궁) 별전에서 56세로 별세한 후, 같은 해 9월 17일에 이곳에 묻혔다.

헌릉은 원경왕후가 죽자 현 위치인 광주(廣州)의 대모산(大母山)을 능지로 선정하였다. 태종이 국상(國喪)에 법석(法席)은 물론 원찰(願刹)도 금한 탓에 원당이 없으며 다만 현판류 8점이 남아 있다.

헌릉의 상설(象設)은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의 제도를 답습하여 망주석을 제외한 모든 석물(石物)을 한 벌씩 갖추어 쌍(雙)으로 배치하고 있다. 즉, 봉분을 2기로 하되 난간을 터서 연결시킨 쌍분제이다.

봉분 하단에 병풍석을 둘렀는데 그 우석(隅石) 우측에 영저(靈杵), 좌측에 영탁(靈鐸)을 양각하였다. 면석(面石)은 와형운문(渦形雲文)을 두르되 중앙에는 각 방위별로 수관인신(獸官人身)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겨 넣었으며, 우석과 면석 하단에는 영지(靈芝)를 조각하였다. 병풍석은 앙련(仰蓮) · 복련엽(伏蓮葉)을 조각했으며, 그 앞은 낮은 돌계단으로 되어 있다.

배치된 상설은 곡장(曲墻) 3면, 병풍석 12면, 난간석 10칸, 혼유석 2, 명등석(明燈石) 2,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 무인석 2쌍, 마석(馬石) 4쌍, 양석(羊石) 4쌍, 호석(虎石) 4쌍, 정자각(丁字閣), 망료위(望燎位), 비각(碑閣: 舊神道碑 1, 新碑 1), 홍살문 등이 있다. 구신도비는 임진왜란 때 손상된 것을 1695년(숙종 21)에 다시 세운 것으로 변계량(卞季良)이 찬(撰)하였다.

인릉(仁陵)은 조선왕조 제23대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의 능이다. 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의 동원합봉(同原合封)으로 이루어졌다.

순조는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소생으로, 1790년(정조 14) 6월 18일에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나 1800년(순조 즉위) 7월 4일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45세로 승하했으며, 1835년 4월 19일 파주 교하의 장릉(長陵) 지역 부근에 처음 장사지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1856년(철종 7) 10월 11일 현 위치로 이장되었으며, 다음 해 순원왕후를 합장하였다.

순원왕후 김씨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로, 1789년(정조 13) 5월 15일 태어났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창덕궁 양심각(養心閣)에서 69세로 별세했으며 같은 해 12월 17일 이곳에 묻혔다. 왕과 왕후는 1899년(광무 3) 11월 17일에 숙황제(肅皇帝) · 숙황후(肅皇后)로 추존되었다.

인릉은 외형상 일반적인 단릉(單陵)과 같이 혼유석 1좌만 있는 2실(室)로 합장하였다. 명등석은 영릉(英陵)을 모방하였다. 석인(石人) 조각은 4등신으로 머리가 어깨 위로 나오고 하반신이 더 길어진 형태이다.

능의 상설은 곡장 3면, 난간석 12칸, 혼유석 1, 명등석 1,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마석 2쌍, 양석 2쌍, 호석 2쌍,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 구표석(舊表石) 1, 신표석 1, 홍살문, 재실 등이 있다. 표석은 천릉(遷陵)했기 때문에 2개가 있다. 한편, 능 입구에 능참봉가(陵參奉家)가 있다.

참고문헌

『문화유적총람』 상(문화재관리국, 1977)
『조선왕릉석물지(朝鮮王陵石物誌)』 상(은광준, 1985)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서울문화재대관』(서울특별시, 1987)
문화재청(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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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나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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