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호미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호미산성은 남강의 수로를 따라 정암진 방면과 법수면 방면을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축조되어 있다. 호미산성은 계단상으로 기반층을 정지하고 그 위로 토루를 축조하였는데 북체성 아래에서 6세기 대의 토기가 출토되었고 석축 남체성 하단에서는 8세기로 편년되는 납석제 개가 출토되었다.
의령 호미산성은 호미산의 정상부(해발 102.5m)에 위치한 석축 산성으로 둘레 438m이다. 진주를 지난 남강이 북쪽으로 흘러가면서 경상남도 의령 죽전리와 경상남도 함안 사정리 사이를 관통하게 되는데 호미산성은 남강의 수로를 따라 정암진 방면과 법수면 방면을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축조되어 있다. 호미산성은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먼저 토성의 기단은 계단식으로 기반암을 정리하고 그 위로 정지층을 조성하였다. 토루는 남체성의 3차 ·4차 축성 공정, 서체성의 2차 축성 공정 단계에서 토층선이 비스듬하게 나타나고 10cm 정도 두께로 반복되어 있으며, 층간 구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성토층으로 구성된다. 각 토층은 점질토와 사질토를 혼합하거나 점토와 기반암반 편을 혼합하여 쌓아 토루로 흘러드는 물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남체성과 서체성 단면에서 목주열이 확인되었다. 남체성에서는 3열의 목주흔이 관찰되었고 서체성에서는 나무가 부식된 구멍이 확인되어 목주를 세운 흔적으로 파악되었다. 석축부의 면석은 정지된 바닥 위로 지대석을 놓고 점판암계 석재를 치석하여 쌓아 올렸다. 면석과 뒷채움석의 크기가 거의 동일하고 면석의 입면은 가늘고 긴 직사각형이지만 내부 안쪽으로 돌출되어 있어 판석과 비슷한 모양이다. 이렇게 돌출된 부분을 뒷채움석이 서로 깍지 끼우듯 맞물리게 고정시켰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호미산성은 기저부를 다져서 조성하고 그 위로 토축하여 쌓아 올리고 그 외면을 정리하여 석축한 토심 석축성으로 보았다. 그러나 서체성 단면에서 토축과 석축 사이에 수혈이 조성된 것이 확인되는 것은 토축 이후 일정한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 준다. 특히 서체성 외벽의 면석을 지대석을 놓은 후 안으로 들여쌓기를 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축조 수법이다. 또한 수백년 동안 유지된 토심석축성에 아무런 수축 흔적이 없는 것도 한 번에 축조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요소이다.
수습된 유물 33점 가운데 남체성 석축 아래에서는 8세기 대의 납석제 개가 확인되었지만 북체성 지대석 하부에서 출토된 것은 6세기 중엽경으로 편년되는 파수부배가 출토되었고 성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 또한 6세기를 전후한 토기들이다. 이상과 같은 축성 과정과 유물의 출토 상황을 고려하면, 호미산성은 토심 석축성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통일신라시대에 다시 점유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화왕산성 서문지에서 확인된 것처럼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석축성으로 개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호미산성의 토축과 석축은 시간 차를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고 토축성은 가야가 축성 주체가 되고 석축성은 통일신라가 축성 주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