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중원(仲元). 충혜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내부부령(內府副令)이 되고, 1354년(공민왕 3)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1356년 한양부윤으로 재직중 충혜왕의 서자 석기(釋器)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371년 총부상서(摠部尙書)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천추사(千秋使)로 파견되었으며, 판개성부사를 거쳐 1376년(우왕 2)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이듬해 문하찬성사 상의(門下贊成事商議)에 올라 우왕이 서연(書筵)을 개최하자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그 사부(師傅)가 되었다.
그 뒤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 등과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이들에게 배척되어 계품사(啓稟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으나 길이 막혀 즉시 떠나지 못하였다. 이 때 사원(私怨)이 있던 간관(諫官) 서균형(徐均衡) 등이 탄핵하여 의령에 유배되었다.
1379년 양백연(梁伯淵)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유배지에서 살해되고 자녀들은 노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