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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후기 학자 신현의 학문과 행적을 모아 엮은 언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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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학자 신현의 학문과 행적을 모아 엮은 언행록.
내용

4권 2책. 신활자본. ‘화해사(華海師)’란 곧 중국의 원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동해 즉 고려의 스승이라는 뜻이니, ‘화해사전’이란 화해사 신현과 관계된 모든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저자의 문인 정몽주(鄭夢周)가 원천석(元天錫)에게 전해 원천석과 범세동(范世東)이 편집해 간행하려 했으나, 고려 말 어지러운 상황 속에 간행을 보지 못하였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그 후손 또한 몰락해 원(元)·범(范)·공(孔) 삼가(三家)에 비장되어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1년강영직(姜永直)이 군산에서 발견해 원본의 오자 낙서를 바로잡아 편집, 교정해 비로소 간행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8권의 규모였으나 중간에 유실되어 4권으로 엮었다. 권두에 강영직의 서문과 동방도통도(東方道統圖)·세계도가 실려 있다.

권1은 비모(備耗)·잠가범(箴家範)·간재홀서(簡齋笏書), 권2는 본조주대(本朝奏對)·원주문답(元主問答)·명조빙문(明朝聘問)·제자문답(諸子問答), 권3은 출처대략(出處大略)·발미(跋尾)·사전계사(師全繼辭)·제자찬사(諸子贊辭)·제자서술(諸子敍述)·동방사문연원록(東方斯文淵源錄), 권4는 부록으로 후학찬사·후학찬술(後學撰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두의 <동방도통도>에서는 우리 나라 유학의 도통을 단군에서 기자(箕子)로 이어져, 설총(薛聰)·최충(崔冲)·김양감(金良鑑)·안향(安珦)·우탁(禹倬)의 차례로 전해져, 우탁이 다시 신현에게 전하고, 신현이 정몽주와 이색(李穡), 그리고 아들 용희(用羲)에게 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몽주나 이색 등의 문로나 학문의 계통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이 책의 발견으로 신현이 안향과 우탁의 도통을 이들에게 전했다고 밝혀진 것이다.

<비모>는 모두 39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주로 송유(宋儒)의 성경설(誠敬說)과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에 대한 신현의 견해를 엮어 편집한 것이다.

<잠가범>은 신현의 아우인 즙(諿)과 아들 용희 등이 성리학의 여러 문제에 대한 선인의 말을 엮어 편집, 교정하고 여기에 자신의 견해를 더해 신현에게 질정한 내용이다. 역시 그의 성리학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 있다.

<간재홀서>는 1381년(우왕 7) 용희가 명나라 태조와 신현이 학문 및 도학·의리명분 등의 내용을 문답한 것을 적은 글이다. <본조주대>는 문인들의 기록으로, 충숙왕과 충혜왕 등 임금과의 주대(奏對)를 모아 저자의 학문과 행적의 소재를 밝혔다.

<원주문답>과 <명조빙문>은 각각 원나라 인종 및 명나라 태조와의 문답 내용인데, 인종과 태조가 모두 저자에게 스승의 예를 갖추고 있어 당시 그의 문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제자문답>은 제자 문인들과 학문의 문제를 두고 문답한 내용이고, <출처대략>은 문인들이 선생의 출처 행적 가운데 앞선 글에서 누락된 것을 습유해 보충한 내용이다. <발미>는 원천석이 이 책을 인간(印刊)한 경위를 적은 것이다.

<사전계사> 역시 원천석이 선생의 생애에 관한 사실 중 누락된 것을 모아 정리한 것이며, <제자찬사>는 명나라의 대학자 송렴(宋濂)을 비롯한 고려 말 조선 초 여러 인사들의 신현에 대한 찬사를 모은 것이고, <제자서술>은 정몽주와 원천석 등 문인 및 후학들이 스승의 학행에 대해 추술한 글을 한데 모은 것이다.

<동방사문연원록>은 본래 범세동의 <화동인물총기 華東人物叢記>에 실렸던 것으로, 앞서 연원도에서의 도통의 연원을 인물별로 구분, 설총에서 정몽주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후학찬사>에는 간행에 앞서 정국필(鄭國弼) 외 112인의 찬사를 모아 수록하였고, <후학찬술>은 강영직 등이 이 책의 간행에 앞서 전국 여러 서원과 유림들의 의견을 수렴, 이 책의 가치를 밝힌 내용이다.

권말의 <화해사전제자안 華海師全諸子案>에는 이 책에 수록된 229인의 이름을 적어 놓아, 고려 말 유학의 계통과 당대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수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다만 이토록 비중있는 문헌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근대에 와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점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신현에 대해서도 아무리 격변기의 와중이었다 해도 ≪고려사≫나 그 밖의 관련 저술에서 거의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은 본 저작의 진위 여부에 많은 의심을 품게 한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후인의 두찬(杜撰)이거나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다분히 많다.

만약 그렇다면 매우 정교하고 세심한 배려에 의해 이루어진 이 책의 편제를 두고 볼 때, ‘통(統)’에 대한 관념이 강조되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의 위작(僞作)일 가능성이 높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깊은 천착과 검증이 요구되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본서의 내용과 의식의 문제는 그 자체로 또 다른 탐구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규장각도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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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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