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도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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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제14대 선조 때 훈련도감에서 책을 찍어내기 위해 만든 각종 목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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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제14대 선조 때 훈련도감에서 책을 찍어내기 위해 만든 각종 목활자.
내용

임진왜란 이후 교서관(校書館)의 인서기능이 마비되자 막대한 병력을 가진 훈련도감이 자급자족책(自給自足策)의 하나로 책을 찍어 팔아 소요경비를 충당하는 후생사업을 선조 말기부터 시작하여 인조 말기 일국의 인쇄업무가 다시 교서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 사이에 훈련도감에서 책을 찍어내기 위하여 만들어 낸 각종의 목활자이다. 전란 후의 사회 혼란과 물자 결핍으로 주자(鑄字)의 새로운 주조는 할 수 없었으므로 흩어진 옛 주자를 주워 모으고 부족한 것은 목활자로 보충하여 인쇄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서기능을 수행할 수 없어 훈련도감에서 남는 병력을 이용하여 많은 목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을 찍어 내는 일을 수행하였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초기의 인본(印本)이 나타나지 않아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종래에는 ≪선조실록≫ 36년 7월 정축조의 ‘내부(內府)로부터 하사받은 활자와 평양에서 보내온 활자는 모두 경진년(庚辰年)에 만들어진 것이다.

훈련도감의 활자는 을해년(乙亥年)에 만들어진 까닭에 그 크기와 모양이 크게 달라 섞어 사용할 수 없다.’는 기록에 따라, 난 후에는 을해년이 없고 기해년(己亥年)이 있을 뿐이므로 훈련도감자가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599년(선조 32) 기해년인 것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선조실록≫의 기사는 실록의 인출과 관련하여 옛 활자를 언급한 것이므로 훈련도감이 만든 활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훈련도감에 있는 을해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난 후에는 교서관의 기능이 마비되어 옛 활자를 훈련도감 또는 공신도감(功臣都監)이 임의로 가져다 인쇄하는 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는 1603년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역대 실록을 인출하고자 옛 주자에 관하여 언급한 기사를 전반적으로 검토해 볼 때 을해자의 수가 오히려 많다고 한 점과, 실제 문제로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당시 인출된 태백산본(太白山本) 실록이 갑인자계(甲寅字系)의 주자와 을해자계(乙亥字系)의 주자가 각각 목활자의 보충으로 번갈아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훈련도감자의 활자 명칭은 당시에 일컬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명명된 것이라는 점도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훈련도감에서 독자적으로 목활자를 만들어 인쇄하기 시작한 시기에 관해서는 새로운 자료의 출현을 기다려 신중하게 연구되어야 한다.

한편,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책 인쇄를 진행시킨 것은 둔전(屯田)을 없애고 책의 인쇄로 유지비용의 일부를 충당한 선조 말기 무렵부터인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훈련도감자본을 보더라도 선조 말기부터로 나타나고 있다.

광해군조에는 1618년(광해군 10)에 무오자(戊午字)가 주조되었으나, 난 후 처음으로 주조되어 그 규모가 작았고, 또한 그것마저 1624년(인조 2)의 이괄(李适)의 난으로 산실된 듯 전해지는 인본이 겨우 4종 뿐이다. 그러므로 광해군조에도 주로 훈련도감자를 사용하여 책을 찍어냈음은 물론이다.

인조 때에 들어와서도 병자호란을 겪은 뒤 한동안 계속되었다. 인조 말기에 세태가 안정되자 비로소 일국의 인쇄업무가 다시 교서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에 대해 1648년 5월에 교서관제조(校書館提調) 조경(趙絅)이 목활자로 인출하고 쓴 ≪찬도호주주례 纂圖互註周禮≫의 발문(跋文)을 보면, “교서관은 본래 한 나라의 장서각(藏書閣)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책의 간행을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라고 강조하면서 책의 인출을 위하여 “공인·활자·종이 약간을 갖추었는데, 그것은 본래 모두 교서관에 소속되고 저장되는 것이므로 추호도 다른 유사들이나 외방을 번거롭게 함이 없어야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 나라의 인서업무가 다시 옛날과 같이 교서관으로 돌아왔음을 뒷받침해 준다. 그 뒤 효종 때부터 현종 초기까지 목활자로 찍어낸 책에는 교서관이 인출하였다는 기록이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조 말기에 교서관이 책 인쇄업무를 재개하였음이 분명하다. 전날 훈련도감에서 경험을 쌓았던 장인(匠人)들도 이 시기부터는 교서관으로 소속되어 인쇄업무에 종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교서관이 맡아 찍어낸 책은 활자체가 그 전의 갑인자계와 을해자계의 상잡한 필서체를 답습, 잡다하게 제작되어 인쇄가 대체로 조잡하다.

그때까지는 훈련도감자의 사용기간을 넓게 보아 1668년(현종 9)의 무신자(戊申字) 주조로 주자인쇄가 다시 부활되기 전까지로 보는 설이 있었으나, 전존하는 실물과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이 끝난 뒤부터 인조 말기 일국의 인쇄업무가 다시 교서관으로 돌아온 때까지로 봄이 타당하다.

이 훈련도감자는 임진왜란 이전에 주조된 여러 활자의 글자체를 본떠서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그 종류는 글자체로 구분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밝혀진 종류는 갑인자체(甲寅字體)·경오자체(庚午字體)·을해자체(乙亥字體)·갑진자체(甲辰字體)·병자자체(丙子字體)의 훈련도감자 등이 있다.

여러 병졸들이 분담하고, 판매의 성격을 띤 것이며, 또 주조가 아니고 목각인 까닭에 글자체를 정확하게 새기지 못하여 그 가름이 까다롭기는 하나, 그 중 잘 새겨진 활자체를 보면 식별이 가능하다. →활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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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상(書體上)으로 보는 근세조선활자체의 변천」(김두종, 『서지』 1-1, 1960)
「임진란후의 활자인본실록자(活字印本實錄字)와 훈련도감자(訓鍊都監字)」(김두종, 『진단학보』 29·30, 1966)
「근세조선후기활자인본(近世朝鮮後期活字印本)에 관한 종합적고찰」(김두종, 『대동문화연구』 4, 1967)
「조선후기활자본의 형태서지학적연구」(백린, 『한국사연구』 3,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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