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말기에 활동한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의 증조부로 백제의 제2관등인 달솔(達率)을 역임하였다.
흑치문대에 대한 기록은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이 유일하다. 이에 의하면 흑치씨는 원래 왕족 부여씨(扶餘氏)였다가 흑치 지역에 분봉(分封)되었기 때문에 자손들이 흑치를 씨(氏)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백제가 봉건제를 시행한 사실은 믿을 수 없고, 흑치씨가 부여씨에서 갈라진 가문임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 갈라져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왕족 부여씨에서 갈라진 이후 흑치씨 가문은 대대로 달솔 관등을 이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문대(文大)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인 현덕(顯德 : 혹은 加亥), 손자인 사차(沙次 : 혹은 沙子), 증손인 상지(常之)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제2관등인 달솔(達率)을 역임하였다. 이것은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과 「흑치준묘지명(黑齒俊墓誌銘)」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흑치씨 가문이 왕족 부여씨에서 갈라진 뒤, 백제에서 제1관등인 좌평(佐平)까지 승진이 가능했던 왕족 부여씨나 대성팔족(大姓八族)과 같은 1급 귀족에는 미치지 못하는 차상급 귀족신분을 유지했음을 알려준다.
문대의 활동 시기나 역관(歷官) 혹은 구체적인 정치 활동은 자료 부족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증손인 흑치상지의 출생이 630년(무왕 31)임을 감안하면 대략 6세기 중반의 성왕·위덕왕대 무렵에 귀족 관료로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의 백제는 관료적 성격이 강한 행정기구로 22부사를 설치해, 좌평 중심의 귀족합의체적 정치 운영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한편, 전국적인 지방통치조직으로 방군성제(方郡城制)를 시행하였다. 그런데 흑치문대는 제2급 귀족 출신으로서 이러한 관료제적 정치 운영을 지향하던 추세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