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읍 오계리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의 7세손인 전라도 병마절도사 조학신(曺學臣, 1732∼1800)이 입향하여 세거해 온 집성촌이다. 이 건물은 금호읍 오계1리에 위치한 조선 말기의 민가로, 2001년 11월 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 · 보존되고 있다.
금산당은 장릉 참봉 조병문(曺秉文)이 1900년에 둘째아들 조명환(曺命煥)의 살림집으로 세워준 가옥이다. 이후 그의 손자까지 거주하다가, 현 소유자 조욱현(曺昱鉉)의 아버지 조규엽(曺圭曄)이 매수하여 아들에게 증여한 것이라고 한다. 대량 장혀의 상량문에 1900년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건물의 배치는 ㄱ자형 평면의 사랑채가 전면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뒤쪽에 一자형 안채가 앉아 있다. 그러나 처음 건립 당시에는 안채 전면 좌측에 3칸의 아래채가 자리하여 전체적으로 튼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었으며, 안채 우측 뒤편으로 협문을 두어 만취당(晩翠堂)으로 출입하였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만취당 보수시 협문을 없앴다. 현재 출입부에 대문채가 있었고 사랑 좌측편에 고방 및 방앗간채가 자리하였다고 한다. 고방채 앞쪽으로 마구 및 초당방이 있어 반가(班家)의 격식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2동만 있다.
사랑채의 평면은 ㄱ자형으로 모서리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2칸 사랑대청을 중심으로 좌측과 안채 쪽으로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좌측 온돌방의 좌측에 중문간을 두어 안채로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우측편으로 툇간을 두었으며 마루 전면쪽으로 퇴를 내고 헌함을 설치하여 격을 갖추었다. 마루 부분과 툇간 부분의 외진주만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툇간 부분은 내진주 위에서 대량과 합보시켰다. 외진주의 기둥과 퇴량의 결구는 상투걸이 수법으로 퇴량 몸에 기둥을 끼웠다. 그리고 퇴량을 곡재로 사용하여 툇간의 점이성이 돋보이며 원주를 세운 부분은 굴도리를 얹어 사랑의 장식성을 높였다. 상부구조는 3량가로 마루 상부 회첨 부분의 결구법이 돋보인다.
안채는 7칸 一자 평면으로 좌측으로부터 부엌 2칸, 안방 2칸, 마루 2칸, 온돌방으로 배열되어 있다. 온돌방 앞쪽과 마루 뒤쪽에 퇴를 두었다. 2칸 온돌방 정면으로 매칸 하부에 머름을 둔 쌍여닫이문과 미닫이문을 둔 이중문 구조이며, 우측 온돌방도 좌측과 동일한 창호를 가지고 있다. 부엌 상부에는 안방에서 오를 수 있는 다락을 두었으며, 정면쪽으로 격자살창을 두었다. 부엌은 기능에 맞도록 전면과 좌측면은 판벽으로 처리하고 살창과 판문으로 마감하였다. 대청 배면은 하부에 머름을 두고 쌍여닫이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좌우는 판벽으로 꾸몄다. 부구조는 3량에 제형판대공을 세웠으며 대량 등 부재들도 매우 섬세한 기법을 지니고 있다. 우물마루의 결구법이 특이하다.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된 영천 만취당 고택(永川晩翠堂古宅)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안채와 사랑채 2동만 있는데, 건물의 배치는 ㄱ자형 평면의 사랑채가 전면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뒤쪽에 一자형 안채가 앉아 있다.
현재 건립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지는 못하지만, 남아 있는 안채와 사랑채는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재료도 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우측에 자리한 만취당과의 관계에 의해 동선과 평면구성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어 한국 전통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