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불암은 조선 후기의 학자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호로서, 본관은 경주, 자는 태초(太初) 또는 여호(汝浩)이다. 18세에 생원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25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평생을 칠계에 은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면서, 향약을 실시하는 등 향촌 교화에도 힘을 쏟았기 때문에 흔히 칠계선생(漆溪先生)으로 불리어졌다. 그는 학문적으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송경(朴遜慶)과 더불어 ‘영남삼노(嶺南三老)‘로 추앙되면서 영남의 유림사회를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이기설에만 매몰되어 있던 학자가 아니라 경제지사(經濟之士)로 평가되는 학자였다.
백불암파 가문은 경주최씨 광정공파(匡靖公派)로서 조선 후기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이다. 특히 18세기 중반 영남유림을 대표하는 대학자였던 백불암 최흥원 이후부터는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잡았다. 이 가문의 대구 입향조는 최흥원의 11대조인 최맹연(崔孟淵, 맹산현감)이며, 이후부터 지묘동, 도동, 옻골 등지에 세거해왔다.
이 가문이 옻골에 입향한 것은 백불암의 5대조인 최동집 때이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으나, 맏아들 최위남(崔衛南)의 자손만이 옻골에 세거하고 나머지 자손은 모두가 외지로 나갔다. 이후 최수학(崔壽學)의 맏아들인 최인석(崔麟錫) 부부가 후손이 없이 요절하자 둘째 아들인 최정석(崔鼎錫)이 승중(承重)하여 종통을 이었다. 현재 이 가문에는 역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서적과 고문서, 필사원본류를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 2종 664점이 2003년 4월 30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가문은 조선후기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가였다는 점에서 볼 때, 이들 필사원본류와 고문서 등 전적은 조선 후기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한 재지사족과 부사 · 감영과의 관계, 재지사족의 존재형태 등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특히 최흥원의 55년간에 걸친 역중일기(曆中日記)와 부인동향약(夫仁洞鄕約)에 관한 자료와 분재기(分財記), 상서(上書), 통문(通文), 명문(明文), 호구단자(戶口單子) 등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가문에 소장된 필사원본류와 고문서는 유일본으로 역사 연구에 있어서 일차적인 자료이다. 이들 자료들은 그 내용이 현실성 · 구체성 · 정확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관찬사료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해당 시대의 사회경제적 이면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선 후기 대구지역 재지사족의 존재형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