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요(高麗歌謠)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작자인 정서가 동래(東萊)에 유배 가 있을 때 선대(先代)의 시문에 대한 비평과 시화(詩話)를 엮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이다.
정서가 인종(仁宗)의 비(妃) 공예태후(恭叡太后) 동생의 남편으로서 총애를 받았으나 정함(鄭諴)김존중(金存中, ?∼1156) 등의 모함을 받아 20년 동안 동래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잡서(雜書)』를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임춘(林椿)이 정서의 시에 차운한「차운정시랑서시병서(次韻鄭侍郞敍詩幷序)」에 “한가로이 사노라니 여가가 많아, 장구(章句)를 찾고 또 선발했네. 느낀 바 심정을 글에다 부치니, 잡다한 내용이 종이마다 가득하네(閑棲多暇日 章句搜且摘 感憤寓諸文 紛紛盈簡策)”에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가 있다. 유배지에서 한적한 생활을 하며 선인(先人)들의 시문을 초선(抄選)하고 그 시문에 대한 품평(品評)을 부쳐『잡서』를 편찬한 것이다.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의 「보한집 발문(補閑集跋文)」에 의하면 이 책의 정식 이름은『습기잡서(習氣雜書)』였으며, 최자(崔滋, 1188∼1260)는 이장용의 집에 소장되어 있던 이 책을 구입하여 『속파한집(續破閑集)』의 뒤에 붙였다고 한다.
3권으로 편찬되었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아 자세한 서지사항은 알 수가 없다. 최숙정(崔淑精, 1433∼1480)이 「동인시화후서(東人詩話後序)」에서 전대(前代)의 비평가로 정서, 이인로(李仁老, 1152∼1220), 김태현(金台鉉, 1261∼1330), 최자,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 전기까지는 전해진 듯하다.『잡서』에 관한 기록은 『보한집(補閑集)』권상,『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의「제가잡저술(諸家雜著述)」등에 보인다.
최자가 『잡서』를 『속파한집』의 뒤에 붙인 것은 두 책이 같은 성격의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이장용도 『잡서』를 신화류(新話類)라 하였는데, 이는『잡서』가 시화집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최자가 『보한집』에서 정서가 『잡서』에 최유선(崔惟善, ?∼1075)의 「규정시(閨情詩)」와 「소시(梳詩)」를 뽑아 넣은 사실을 높이 평가한 대목에서 그러한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속파한집』의 부록인 『잡서』의 일부 내용이 『보한집』에 나오는 것은 최자가 선사(善寫) 과정에서 『잡서』를 인용하고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보탰기 때문이다. 즉 『속파한집』에 『잡서』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편입한 것이 『보한집』인 셈이다.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시화집은 이인로의『파한집(破閑集)』이지만, 시기적으로 정서의 『잡서』가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에 해당한다. 따라서 고려시대 비평사의 단초(端初)를 열었다는 점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