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활집(短豁集)』은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단활집』에 관한 기록은 『춘정집』 추보(追補), 『용재총화』 권8,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의 예천군 명환(名宦),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해동잡록』 권3 등에 보인다. 『춘정집』과 『용재총화』에는 그 분량이 1질이라고 하였다. 현전하는 그의 시문은 『동문선』 권10에 수록된 「마천사사친당도(馬天使思親堂圖)」라는 한시 1수뿐이다. 효도와 관련된 내용이다.
이혜는 본관이 재령(載寧)으로, 강맹경(姜孟卿, 1410~1461)의 외조부이다. 키가 작고 입이 언청이였으므로(혹은 치아가 성글었기 때문에) 단활옹(短豁翁)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일찍이 보주(甫州: 경북 예천) 태수가 되었을 때 정사(政事)를 잘한 공적이 있었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은 「권선달맹손행기보주이사군혜(權先達孟孫行寄甫州李使君惠)」라는 시를 지어(『춘정집』 권1), “단활의 새로운 시는 응당 상자 속에 가득한데, 벗들에게 부쳐서 보게 한들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短豁新詩應滿篋 何妨寄與故人看)”라고 그의 시재(詩才)를 칭찬하였다. 또 이혜로부터 시문집을 전달받고 「보주사이혜이침석견혜차전소자저시고일질이시답지 2수(甫州使李惠以寢席見惠且傳所自著詩藁一秩以詩答之 二首)」라는 시를 지어(『춘정집』 추보) 당(唐)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에 비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혜가 ‘시로 유명하다’고 하였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