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집(南都集)』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 권99 「최유청열전」과 『해동문헌총록』의 「제가시문집(諸家詩文集)」 등에 보인다. 최자(崔滋)가 엮은 『보한집』(권상)에서는 최유청의 문집을 『문숙공가집(文淑公家集)』이라 하였는데, 『남도집』과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집이 현전하지 않아 서지와 내용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동문선』에 한시 10여 수와 산문 50여 편이 남아 있으며, 전원생활의 한가로움을 읊은 「잡흥(雜興)」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편 최유청은 왕명으로 『유문사실(柳文事實)』과 『이한림집주(李翰林集註)』를 편찬하였다. 이는 당(唐)나라 문인 유종원(柳宗元, 773~819), 이백(李白, 701~762)과 관련된 책들이지만,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최유청은 본관이 창원(昌原, 강원도 철원)이고, 자가 직재(直哉)이다.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를 조직한 최당(崔讜, 1135~1211)의 아버지이다. 배우기를 좋아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정통하였고,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다. 평소 그의 덕망이 무신들에게까지 감화를 주어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마음가짐이 정직하여 일대의 명신(名臣)으로 추앙받았으며, 날마다 불경을 외울 정도로 불교를 좋아하였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