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가 고금의 시문(詩文) 약간 권(卷)을 모으고 이색(李穡, 1328∼1396)에게 제목을 구하자 이색이 『선수집(選粹集)』이라 이름 지어주었다. ‘선(選)’은 양(梁)나라 소통(蕭統, 501~531)의 『문선(文選)』에서, ‘수(粹)’는 송(宋)나라 요현(姚鉉, 968∼1020)의 『당문수(唐文粹)』에서 취한 것으로, 곧 정수(精髓)를 뽑았다는 뜻이었다. 이색이 쓴 「선수집서」에 따르면, ‘김경숙(金敬叔)이 편찬했다’고 하였는데, 김경숙은 김지이다. 문헌 기록 중에 편자가 김구용(金九容, 1338~1384)으로 된 것은 잘못이다.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하면서 『선수집』을 김경지(金敬之, 김구용의 자)가 편찬했다고 잘못 소개하고, 김휴(金烋, 1597~1638)가 이를 참조하여 『해동문헌총록』을 편찬하면서 김구용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김지의 생애와 활동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362년(공민왕 11)에 과거에 급제하고 문학에 뜻이 독실하였으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써서 공민왕의 칭찬을 받았다. 또 낮은 벼슬을 하면서도 책을 수백 권 수집하였으며, 중년에 벼슬을 마다하고 물러나 문장을 모으고 전고(典故)를 상고하여 노년에 『선수집』과 『주관육익(周官六翼)』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선수집』은 현전하지 않는다. 이색이 쓴 「선수집서」와 「증김경숙비서시서(贈金敬叔秘書詩序)」(『목은문고』 권9)를 통하여 책의 성격을 짐작해 볼 수가 있다. 「선수집서」에 의하면, 이 책은 ‘고금의 시문’을 대상으로 했다고 하였다. 김휴는 이를 중국의 글을 모은 것으로 보고 ‘중국시문찬술(中國詩文撰述)’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이색의 두 서문을 보면 중국과 고려의 시문을 함께 선발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증김경숙비서시서」에서 “김경숙이 우리나라에 선집(選集)이 적은 것에 발분하여 『동국문감(東國文鑑)』이나 『동인지문(東人之文)』과 같은 종류의 시문선집을 편찬하였다.”고 한 언급을 통해 우리나라의 시문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서지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부전(不傳) 문집이라 그 의의를 구체적으로 논할 수 없으며, 다만 산견된 기록을 종합하여 문집의 존재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