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에 대한 강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원가의 반정부시위가 끊이지 않자, 집권 3년차인 1983년에 구속 학생의 석방과 제적학생의 복학조치와 같은 유화적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이들 주역들이 학원가로 돌아오면서 침체되었던 운동권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즈음 운동권 내부에서는 이전의 민주화운동의 실패가 민중의 참여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 결과 유화조치로 인해 풀려난 청년들의 주도로 민중민주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이 결성되었다. 1985년 5월민청련을 비롯한 민주화운동단체들이 ‘광주학살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대회’를 주최하면서 민청련에 대한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졌다. 그 결과 김근태를 비롯한 여러 관련자들이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김근태에 대한 고문사실이 알려지자 민청련과 신민당이 주도하는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구성되었고, 공대위는 후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로 발전하여 1987년의 6·10민주항쟁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민청련은 1992년 9월에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로 확대개편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