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41은 1988년 지정된 보물로, 송나라 화엄학승인 정원(淨源, 10111088)이 80권본 『화엄경』 본문을 나누고 그 아래에 80권본 『화엄경』에 대한 징관(澄觀, 738839)의 주석서(『대방광불화엄경소』)의 해당 부분을 실은 총 120권의 주석서 중 제41권이다.
참고로 80권본 『화엄경』은 주본(周本) 『화엄경』이라고도 하며, 당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국호를 주(周)로 정했을 때 한역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모두 80권으로 이루어져 80권본 『화엄경』 또는 『팔십화엄경』이라고도 한다. 이는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59~429)가 418~420년에 번역한 진본(晉本) 『화엄경(華嚴經)』에 이어 새로 번역한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징관의 『대방광불화엄경소』이다.
의천은 송나라 유학 시절 당시 화엄학의 대가인 정원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의천이 혜인원에 머무는 동안 정원에게서 정원 자신이 엮은 『대방광불화엄경소』 1질 120권을 기증받았다. 의천은 귀국하기 전에 그 전질(全帙)의 판각을 항주의 각수 엄명(嚴明) 등에게 주문하였고, 정원은 1087년(선종 4) 3월 송 선상(船商) 서전(徐戩) 등을 통해 모두 2,900여 판에 이르는 목판을 고려의 의천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인 1424년(세종 6)에 대장경판을 달라는 일본의 끈질긴 요청에 이 목판을 대신 주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판들은 일본 교토 쇼코쿠사(相國寺)에 비치되었으나, 후에 화재로 전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교를 통한 동양 3국의 문화 교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다.
『대방광불화엄경소』 권41은 『대방광불화엄경소』 120권본 전체 목판(木板)을 14세기에 개성(開城)에서 인출(印出)한 것 중에서 권 제41만을 1권 1첩(帖)의 절첩본(折帖本)으로 만든 책이다. 현재 관문사가 소장하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41은 다른 것과는 달리 권머리에 「각주화엄경도변상연기(刻注華嚴經都變相緣起)」와 「변상도(變相圖)」가 실려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의천에게 보낸 이 경판에는 변상도가 없어 1372년(공민왕 21)에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에서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보물로 지정된 『대방광불화엄경소』 권41은 변상도가 처음 등장하는 판본으로 동일본의 인출 시기를 추정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방광불화엄경소』 권41은 목판본이면서 절첩본(折帖本)이다. 『대방광불화엄경소』 권41의 판식(版式)은 테두리마다 하나의 검은 선을 돌린 상하단변(上下單邊)이고, 본문은 검은 선이 있는 오사란(烏絲欄)에 20행 15자,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되어 있다. 책 크기는 31.5㎝✕10.7㎝이며, 광고(匡高)는 23㎝이다.
절첩본의 표지는 짙은 감색(紺色)이며, 책머리에 변상도(變相圖)가 첨가되어 있는 것이 동종(同種)의 다른 보물류와의 차별점이다. 변상도의 시작 부분에 ‘각주화엄경도변상록기(刻注華嚴經都變相綠起)’라는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대각 국사 의천이 머물렀던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에서 내부령(內府令)의 지위에 있던 이미충(李美冲) 등이 주관하여 1372년(공민왕 21) 9월에 변상도를 판각하였다. 이로 보아 중국에서 제작되어 1087년에 고려에 전래된 ‘『화엄경소』 120권’에는 원래 변상도가 없었고, 1372년 당시에 변상도를 고려에서 추가로 판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중국에서 전래된 본문의 목판 전체가 이 당시에 영통사에 보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고 약칭(略稱)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不二〕’라는 것을 중심사상(中心思想)으로 하고 있다.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의 불교 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대각 국사 의천의 요청으로, 중국 송(宋)에서 판각되어 1087년경에 고려에 수입된 ‘『화엄경소』 120권’ 목판(木板)은 ‘주화엄경판(注華嚴經板)’으로 지칭된다. 1424년(세종 6)에 조선 시대에 들어와 일본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재조대장경( 해인사 대장경, 팔만대장경) 목판을 달라고 조선 조정에 요청할 때, 세종이 재조대장경판 대신 이 주화엄경판을 일본 사신에게 주어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은 해인사에 있는 고려 재조대장경판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욕구가 강렬하였지만 당시 조선이 유교 국가였음에도 우리 전통의 불교 유산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고려 재조대장경판이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았던 역사적 사례를 볼 수 있다.
요컨대 고려시대 중국 송(宋)나라에서 판각된 주화엄경판은 고려시대에 잘 보존되었다가, 조선 세종 때 일본과의 선린 외교(善隣外交)의 측면에서 일본으로 전래됨으로써 불경 연구 목판을 통한 한(韓) · 중(中) · 일(日) 삼국의 문화 교류의 대표적인 사례 및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