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산성전투 ()

고려시대사
사건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광주산성(廣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
역사적 배경

1232년 6월 고려가 몽골과의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자 사르타이[撒禮塔]가 지휘하는 제2차 침입군이 1232년 8월말 경 고려에 침입하였다. 사르타이는 한강을 건너 광주(廣州)라는 중요한 내륙 거점을 확보하여 남진을 모색하는 한편 강화도로 통하는 수로를 차단하여 강도(江都)조정을 압박하기 위해 광주산성을 공격하였다.

경과 및 결과

몽골군 본대가 남하하자 광주의 부사(副使) 이세화(李世華, ?∼1238)는 광주산성에 입보하여 급히 성을 수리하고 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사르타이의 몽골군은 광주산성을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해왔는데 이세화는 성안에 입보한 광주사람들과 함께 방어에 전력하였고, 상황에 따른 대응을 적절히 하여 적군 다수를 살상하고 포로로 잡았다. 전투는 1232년 12월에까지 걸쳤으나 몽골군은 끝내 광주산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처인성(處仁城) 쪽으로 남하하였다.

의의와 평가

사르타이의 공격을 막아냈던 광주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 축성되고 고려시대에 일장성(日長城, 혹은 晝長城)이라 불렸던 오늘의 남한산성이다. 광주산성의 공격에 실패한 사르타이는 고려 공격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확정하지 못한 채 처인성을 공격하다가 1232년 12월 16일 사살되었다. 광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세화는 광주부사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영전하였으며, 광주민들은 수년 후인 1235년(고종 22)에 국가로부터 요역(徭役) 등을 면제 받았다. 광주산성전투는 제2차 몽골 침입 때 고려 지방민이 정부군의 도움 없이 거둔 승첩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여몽전쟁과 강화도성 연구』(윤용혁, 혜안, 2011)
『고려대몽항쟁사연구』(윤용혁, 일지사, 1991)
『대몽항쟁사』(유재성,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8)
「1232년 용인 처인성에서의 대몽승첩」(윤용혁,『여몽전쟁과 강화도성 연구』,혜안, 2011)
「몽골의 2차침구와 처인성승첩: 특히 광주민과 처인부곡민의 항전에 주목하여」(윤용혁,『한국사연구』29, 1980)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강진철,『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