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방광불화엄경소』는 『대방광불화엄경』 주본(80권본)을 바탕으로 당나라 징관(澄觀)이 지은 『화엄경소』에 송나라 정원(淨源)이 주해를 한 것으로 모두 120권이다. 대각국사 의천이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 권제1의 『대화엄경』 아래에 있는 ‘대소주경(大疏注經) 120권(一百二十卷) 정원이청량대소주어경하(淨源移淸凉大疏注於經下)’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대방광불화엄경소』는 의천이 주도했던 『제종교장』의 하나가 된다. 『신편제종교장총록』, 『고려사』 및 『세종실록』 등에는 『대소주경』, 『신주화엄경』 또는『주화엄경』 등으로 일컫고 있다.
의천은 자신이 수집한 교장의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완성하고, 수록된 불전을 간행하고자 하였다. 간행방식은 흥왕사의 교장도감에서 간행하는 분량 이외에도 송나라에 주문하기도 하였다. 이 불전은 의천이 은 3,000냥을 주고 송나라에 주문하자 1087년 3월에 송나라 상인 서전(徐戩) 등 20명이 2,900여 판을 가지고 왔는데, 바로 그 인본이다.
41첩 중에서 표지는 온전한 것과 탈락된 것이 있다. 온전한 것은 상지의 표지 가운데에 금니로 그린 쌍선의 장방형 안에 「대방광불화엄경소권제OO(大方廣佛華嚴經疏卷第OO)」라고 적어 놓았다. 사주단변, 유계, 20행 15자, 소자는 40행 20자, 한 장은 4행씩 5면으로 절첩하였다. 종이는 우수한 저지(楮紙)이며, 인쇄상태도 대체로 좋은 편이다.
각 권의 끝에는 옛날 이 불전을 열람하였거나 소장했던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묵서가 있다. 곧 권4에서 권제65까지는 “정사칠월남백사지임희(丁巳七月南白寺持任熙)”와 같이 남백사 지임(持任)인 희(熙)가 열람 또는 소장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정사년은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남백사는 경남 창원의 백월산에 있던 사찰로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 또 권제4부터 권제116까지의 묵서를 통해, 계축년(1553년)부터 갑인년(1555년)까지 대승사(大乘寺)의 지응(智膺)이 열람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 시봉(侍奉)은 각원(覺圓)이었다. 대승사는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사찰로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끝으로 권제102와 권제114의 묵서에는 “만력30년 임인(1602년)에 인원(印源)이 경건하게 열람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이 소는 시간적 차이를 두고, 최소한 세 차례에 걸쳐 열람 또는 이전되면서 전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보물로 이미 지정된 『대방광불화엄경소』 8건 중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1992년 보물로 지정된 권30, 구인사 소장의 권68,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의 권제21,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의 권제48, 64, 83 등 4건은 계명대학교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소』와 함께 최소한 17세기 초기까지 같은 질(帙)로 전해지던 것들이다. 이 권들이 어느 시기에 분리되어졌는지는 알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지정된 이 4건의 각 권의 끝에 있는 묵서와 계명대학교 소장본의 내면의 묵서가 동일한 인물들에 의해서 필사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후 이 경판은 1424년(세종 6) 1월에 윤인보를 통해 해인사 대장경판을 구청하는 일본사신에게 대장경판 대신에 사급되었다. 당시 사급된 주화엄경판이 대각국사 의천이 입수한 경판이라는 사실은 “주화엄경판은 옛날 종사 대각화상이 어명으로 송나라 조정에 요청하여 바다건너 온 것”이라고 설명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에 건너간 이 경판은 처음 상국사(相國寺)에 안치된 사실까지 박안신의 복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나 이후 일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에서 큰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내용은 석가모니부처가 중인도 마가다국의 보리수 아래서 정각(正覺)을 이룬 뒤 구름처럼 모인 대중들에게 스스로 깨달은 내용을 말한 것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경전이며, 이 소는 『대방광불화엄경』에 대한 해설서이다.
41첩의 이 『대방광불화엄경소』는 고려의 요청에 따라 송나라에서 경판을 완성하여 고려에 보내온 역사적 기록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자료이다. 이 수입경판은 다시 일본으로 사급됨으로써,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의 불교문화의 교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의천이 완성하고자 한 교장의 완성과정과 경판의 후대 전래사실 및 실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