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박익벽화묘는 문인석(文人石) 1쌍, 갑석(甲石), 호석(護石: 묘를 보호하기 위해 봉분 둘레에 세워진 판석으로 병풍석이라고도 함)을 갖춘 방형분(方形墳)으로 1420년(세종2)에 축조된 것이며, 1999년 9월 태풍으로 무너진 봉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지석(誌石), 유물과 함께 벽화가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것으로는 처음 발굴된 채색 벽화묘로 2005년 2월 5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7월 28일 밀양고법리박익벽화묘에서 밀양박익벽화묘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무덤 내부 사방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박익벽화묘는 1420년에 축조된 것으로 석인상, 갑석 호석을 갖춘 방형분이다. 봉분은 가로 605㎝, 세로 482㎝, 높이 230㎝이며, 내부 석실은 깊이 410㎝, 길이 235㎝, 폭 90㎝, 높이 80㎝로 총 면적은 2,642㎡이다.
무덤의 주인인 박익은 고려 말기 문신으로 초명(初名)은 천익(天翊)이며, 본관은 밀양,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가 망한 후에는 두문동에 은거하며 나가지 않고 지조를 지켰던 고려말기 8은(8隱) 중 한 사람으로,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은집(松隱集)』이 있다.
이 벽화묘에서 주목되는 것은 수도(隧道: 땅 속으로 난 통로)를 갖추고 있는 방형분이라는 점이다. 조선전기 횡구식 석실(石室) 중 수도가 확인된 것은 아직 없으며, 묘도(墓道)와 구(溝: 도랑)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양식상의 원류에 관한 자료가 된다. 또한 방형분은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까지 일정한 계층에서 유행했던 무덤 형태 중 하나이지만 남쪽으로 수도를 설치한 것과 병풍석(호석)을 경사지게 한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한편 화강암으로 만든 석실 내부의 벽화는 프레스코화법(벽면에 석회를 바르고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그려졌으며, 인물, 도구, 말 등 주인공 생전의 생활상을 묘사하고 있어 당시 풍속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고려말기 생활을 보여주는 벽화의 풍속 장면은 고려말 조선초 벽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벽화에 보이는 인물들의 의복, 머리모양, 색채 등은 복식문화사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풍속, 인물화가 드문 상황에서 한국 회화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