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터는 해발 328.6m 우암산 비호봉의 서남쪽 산줄기인 혜음령 고개에서 북쪽으로 약 1.2km 정도 떨어진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1999년에 터에서 ‘혜음원(惠蔭院)’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막새기와가 출토되면서 확인되었다.
혜음원은 고려 수도인 개경과 삼경(三京) 가운데 하나인 남경(南京)을 오가는 관리나 백성을 위하여 건립한 숙박시설이다. 사찰과 함께 국왕이 사용할 수 있는 별원(별궁)까지 갖추어 규모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혜음원과 관련해서 김부식이 지은「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가 전한다. 이에 따르면, 혜음원은 예종이 비구 응제(應濟)와 제자 민청(敏淸) 등에게 명령하여 1120년(예종 15)에 공사를 시작한 뒤 2년 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혜음원과 함께 있었던 절은 인종이 이름을 내려 ‘혜음사(惠陰寺)’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인종 이후에 큰 화재로 모두 불탔는데,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약탈하고서 불을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터에서는 2004년까지 5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작업이 진행되었다. 발굴 결과 혜음원 경역은 원, 행궁, 절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13세기에 불탄 뒤 14세기 이후 작은 건물을 다시 짓고서 일부 경역을 다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터에는 동서 약 104m, 남북 약 106m에 걸쳐 9단으로 조성된 건물터와 함께 연못이 확인되었다. 연못은 건물터 사이에 자리하였는데, 네모난 형태로 원터 전체에 5곳이 흩어져 있다.이외에 건물터에서는 금동여래상, 향완(香垸)등과 함께 많은 양의 기와와 자기 파편 등도 출토되었다. 금동여래상은 높이가 6.3㎝로 작은 편으로, 신라 말 고려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