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브라질 (newsBra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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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브라질 한인사회에서 최초로 등장한 타블로이드판 광고지.
내용 요약

《뉴스브라질》은 1985년 브라질 한인사회에서 최초로 등장한 타블로이드판 광고지이다. 1965년 브라질로 이민을 온 김정남이 개인적으로 설립했다. 1985년부터 2011년까지 총 4천5백 부를 발행했다. 브라질의 주요 일간지나 주간지에서 한인들에게 필요한 기사들을 발췌·번역하여 정보를 제공했다. 한인사회 내에서의 상품 판매와 구입, 정착에 필요한 안내와 정보를 광고란에 실어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2011년 브라질 한인사회에 두 개의 인터넷 신문사가 등장하면서 폐간했다. 브라질 한인교포사회로부터 한편으로 칭송을 받았지만, ‘무가지 광고지’로 평가절하 받기도 했다.

정의
1985년 브라질 한인사회에서 최초로 등장한 타블로이드판 광고지.
개설

김정남(金禎男)이 개인적으로 설립한 신문사로 1985년부터 2011년까지 26년 동안 총 4천5백부를 발행하였다. 그는 1942년 강원도 평강 출생하였고, 본관 김해김씨이다.

브라질의 주요 일간지나 주간지에서 한인들 경제활동에 필요한 기사들을 발췌·번역하여 정보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한인사회에 비판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김우진 컬럼> 을 따로 제공하여 한동안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설립목적

김정남은 브라질 한국이민 20년이 지난 1983년 이후 갑작스럽게 증가하기 시작한 한인의 수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러한 증가는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가지(無價紙) 한국어판 신문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브라질에 이미 정착한 한국이민자들과 새로이 브라질에 도착하고 있던 한국 불법이민자들에게 정확한 브라질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 서로 간에 이익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즉 전자에게는 사업상의 이익을, 그리고 후자에게는 브라질이란 환경에서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김정남은 1965년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했다. 이민 초창기 그는 부모님의 사업을 도왔다. 처음 3년 동안에는 상파울루 근교의 일본인 농장이 많이 존재하는 이따께라(Itaquera)에서 양계장을 운영하셨고, 1968년에는 브라질리아에서 식품점을 운영하셨다. 그리고 1969년에는 다시 상파울루 한인촌으로 돌아와 의류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1983년 그는 브라질리아에서 있었던 경험을 되살려 무가지 신문사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1968년 당시 브라질리아에는 한인 10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식품점에 물건을 사러 오는 한인들이 포르투갈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부딪쳐야 하는 답답한 현실을 목격하고, 짧지만 그들을 위해 브라질 뉴스를 번역·배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가 사용한 방법은 우선 기사를 번역하고, 번역된 기사를 등사지에 손으로 옮겨 쓴 다음, 빈병으로 밀어서 10부 정도를 찍어내는 것이었다.

연원 및 변천

김정남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문사를 창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첫째는 그가 부모부터 독립하여 시작한 자신만의 사업 - 성베르나르도 도 깜뽀(São Bernardo Campo)의 아동복 소매업과 상파울루 시내의 약국 -을 계속 실패했고, 둘째는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고 판단한 그의 부모들이 그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다는 것, 셋째는 그의 높은 수준의 학력이었다. 이민 당시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 2학년 재학 중이었고(경기고 57회 1961년 졸업), 1967년에는 미국의 캔사스 대학(The University of Kansas)에서 한 학기 수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브라질로 되돌아가 1971년 상파울루 대학교 (USP - Universidade de São Paulo)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뉴스브라질」은 처음 A4용지 크기로 신문을 발행했으나, 나중에 B4용지 크기로 바꾸었다. 그런데 신문의 광고주들이 자신의 광고를 모두 1면에 넣어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그는 1면 전면에 광고를 넣었다. 지금은 이러한 종류의 광고가 흔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이와같은 시도는 아주 획기적이었다. 신문사 사무실에는 여직원 한 명과 편집인 한 명, 그리고 번역인 한 명을 고용했으나 실제적으로 사장인 그가 수금과 번역일 등 모든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문을 만들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제목을 만들기’였다고 회고한다. 당시 신문제작기법은 등사용지에 타자를 쳐서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작은 타자기로는 제목에 사용될 큰 글자를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에서 제호에 따라 작은 글자에서부터 큰 글자에 이르는 글씨본을 구입했다. 그리고 신문기사에 맞는 제목을 만들 때마다 하여, 제호에 따른 글자를 복사하여, 그것들을 일일이 가위로 잘라서 사용했다.

기능과 역할

당시 브라질 한인사회 교포 대부분이 포르투갈어에 무지했다. 그들은 브라질 신문이나 방송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 일어난 브라질 정치체제의 변화 -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되던 과도기 - 에 그가 전해주는 브라질의 경제정책변화나 브라질 사회에 대한 새로운 소식은 매우 환영받았다. 그리고 한인사회 내에서의 상품 판매와 구입, 정착에 필요한 갖가지 안내와 정보를 위한 광고는 한인사회 내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현황

김정남 사장은 그동안의 재정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뉴스브라질」을 사명감으로 26년간 유지했다. 하지만 브라질이 20세기 말 BRICs 국가 중의 하나로 주목받으면서 모든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21세기 초 노동자당의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브라질은 대내외적으로 경제적 호황을 누렸는데(2002-2010), 이 때 한국 정부와 기업은 물론, 한국의 유수 언론사들과 방송사들의 브라질 진출이 급증했다. 그런데 「뉴스브라질」이 2011년 폐간을 선언한 결정적인 원인은 브라질 한인사회 내에서 새롭게 등장한 두 개의 인터넷 신문사였다.

의의와 평가

1985년 「뉴스브라질」이 발간되기 이전 브라질 한인사회에는 이미 일간지『한국일보』와『조선일보』, 그리고 주간지『주간 조선일보』등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 신문들의 기사는 대부분 한국 신문의 기사를 재생산해 내는 수준에 머물렀다. 따라서 브라질에 대한 정보를 매일 발췌·번역해서 제공했던 「뉴스브라질」은 브라질 한인교포사회로부터 한편으로 열렬한 칭송을 받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무가지(無價紙) 광고지’로 평가절하 받기도 했다.

참고문헌

『브라질한인이민 50년사(1962~2011)』(브라질한인이민사편찬위원회, 도서출판 교음사, 2011)
집필자
최금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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