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조 ()

현대사
인물
해방 이후 브라질 농업이민을 태동시킨 교민.
정의
해방 이후 브라질 농업이민을 태동시킨 교민.
개설

김수조는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일본국적으로 브라질에 도착하여, 1960년대 초반 브라질에서 만난 정인규 육군대령을 설득, 민간인 차원에서 대한민국 수립이후 최초의 공식이민인 브라질 농업이민을 1963년 2월 12일 103명이 브라질 도착하여 일으켰다.

김수조는 정치적 리더십뿐만 아니라 사업적 감각도 있던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브라질 정부로부터 금지되었던 패전국(일본 독일 이태리)의 브라질 이민 유입이 1950년대 중반 재개되자, 그는 한국인들의 브라질 이민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한국은 자유당 시절부터 중남미 이민에 대한 가능성을 여러 측면에서 타진하며 검토했지만, 외화유출을 우려한 정부의 방침에 따라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일어난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쿠데타는 즉각적으로 브라질 한국이민의 태동과 연계되었다. 그것은 임시군사정부의 인구 억제 정책과 박정희 의장과 육사 2기 동기였던 정인규 대령의 임시군사정부에 대한 영향력이 어느 정도 컸기 때문이다.

정인규 대령은 1961년 6월 1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계사격대회에 이종욱 중령(승진)과 함께 한국 대표단 선수들을 이끌고 참가했다. 경기도중 정인규 대령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일어나, 그것이 브라질 신문에 기사화 되었다. 이 기사를 읽은 김수조는 상파울로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단숨에 찾아가서 정인규 대령과 이종욱 중령에게 브라질 한국 이민사업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했다.

이에 정인규 대령은 병상에서 친분을 쌓아 놓은 브라질 재향군인회 브라가(Braga) 회장의 주선으로 김수조와 이종욱 중령과 함께 브라질 대통령 자니오 꽈드로스(Janio Quadros)를 예방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꽈드로스 대통령은 200가구의 한국 농업이민을 구두로 약속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당시 외국으로부터 이민자들의 유입이 실질적으로 끊긴 상태였고, 둘째 1908년부터 받아들인 일본농업이민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었으며, 셋째 그들이 요구하는 한국인 이민쿼터가 상대적으로 아주 적었기 때문이다.

정인규 대령은 귀국 직후 곧바로 「한-백 문화협회(회장 이종욱)」에 가입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5.16군사 쿠데타 이후 「제대장병동우회」를 결성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대군인을 규합한 이민 계획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건의했다. 정인규는 예편 후, 「문화사절단(총 15명)」이라는 독자적인 단체를 조직하여 1961년 12월 브라질을 재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문화사절단의 15명이 김수조의 이민사업 추진을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동상이몽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브라질 이민을 둘러싼 온갖 말썽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생애

김수조는 경북 출신으로 17세 때 일본 북해도 광산에 징용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일본의 ‘모범 케이스’ 이민으로 선발되어 1926년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브라질 일본사회에서 아오끼 이사부(靑木伊三郞, あおき ぃさぶ)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일본인 행세를 했다. 따라서 브라질 일본인회 부회장직을 맡기도 하고,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일본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신도 헤메이(しんどう へいめい)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최근의 자료는 그가 브라질 정부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는 근거로 그가 신토 헤메이의 회원이 아니라 단순 참가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 김수조는 부인 다나가쓰지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처조카 이노마다 요시오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당시 그는 상파울루의 꼰솔라썽 거리(Rua da Consolação)에 위치한 1층 상점에서 중고가구점을 운영하며 2층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이 때 그는 브라질 외부성의 요청으로 1956년 2월 6일 인도를 거쳐 무국적으로 브라질에 도착한 51명의 반공포로들을 장승호와 이중창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서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브라질 정착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돕던 중, 1년 반 만인 1957년 9월 15일 자신의 정치적 지도력을 또 다시 발휘하여 「한백인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정관을 만들고 그 정관에 의해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한다. 비록 이 조직이 친목단체의 성격을 띠고 또한 이렇다 할 활동의 결과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일제강점기 브라질에 도착한 조선인들과 반공포로들을 모아 처음으로 한민족단체를 결성했다는 것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 두 그룹 모두 서로 함께 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활동사항

한국의 임시군사정부는 김수조와 정인규 두 민간인들의 이민사업계획을 국가경제발전을 위한 인구감소정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1962년 3월 9일 이민법을 제정하며 뒷받침했다. 하지만 실제적인 일은 모두 위의 두 사람 몫이었다. 김수조는 브라질에서 정인규 「한-백 문화협회(사단법인)」의 정인규 회장과 협의 하에 우선 브라질에 「브-한 문화협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두 기관은 역할분담을 위해 협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한국의 「한-백 문화협회」가 한국에서 이민희망자 모집과 이민 수속을 담당한다면, 브라질의 「브-한 문화협회」는 브라질에서 한국이민을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수속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인규는 이민희망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법인단체만이 이민을 모집할 수 있다는 정부의 해외이주법에 따라, 문화사절단의 근거였던 「한-백 협회」를 주식회사체제로 변경하며 「한-백 진흥 주식회사」라고 명명했다.

김수조는 「브-한 문화협회」이름으로 「브라질 국립 이민 및 식민 연구원(INIC - Instituto Nacional de Imigração e Colonização」 (이 기관은 오늘날의 「브라질 국립 식민 및 농지개혁 연구원(INCRA - Instituto Nacional de Colonização e Reforma Agrária)」으로 바뀌었다) 에 한국 집단농업이민계획과 이주자 명단을 제출하고, 1962년 5월 17일 34세대에 대한 이민자 지명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김수조가 「브-한 문화협회」이름으로 허가받은 이 34세대 명단의 절반인 17세대는 「한-백 문화협회」의 정인규 회장이 보낸 사람들이 적힌 명단이었고, 또 다른 17세대는 한국에 있는 자신의 조카 김영두가 「남미공사」이름으로 제출한 명단이었다. 「남미공사」는 김영두가 친지인 영락교회의 장로 김승한과 발기한 회사로 이미 이민희망자 모집을 끝내고 그 명단을 직접 자신이 들고 브라질에 가서 김수조에게 전달했다.

브라질 정부가 「브-한 문화협회」 김수조 앞으로 발급해준 한국이민 허가서와 사전입국 지명허가서 (기독교인 8세대, 천주교인 4세대, 일반 5세대) 사본을 한국정부의 보건사회부 이민과에도 발송하자, 그 때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된 정인규는 김수조에게 협약위반이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에게는 자신이 세운 「한-백 진흥 주식회사」만이 유일한 합법적인 단체라고 주장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의미에서 「사단법인 한국이민협회 (초대회장 김동성)」를 이민수속 전담기관으로 지명했다. 왜냐하면 「남미공사」는 이민을 추진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위법단체였고, 「한-백 진흥 주식회사」는 법적 지위는 갖고 있었으나 정부가 합법 이민 취급 단체인 「사단법인 한국이민협회」를 발기한 직후 그 자격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단법인 한국이민협회」는 현실적으로 이민을 추진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위의 세 단체가 서로 협동하여 「사단법인 한국이민협회」의 이름으로 이민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밟도록 했다. 이런 결정은 법무부 장관의 이민법에 대한 유권해석으로 내려진 것이었다 (배성욱 2003; 손정수 2007: 144).

어째든 김수조는 브라질 INIC로부터 자신의 명의로 116가구의 한국이민 쿼터를 배정받아, 한국인들의 제1차 집단영농이민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1963년 2월 12일 제1차 한국 집단농업이민이 103명이 브라질에 도착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켰다.

김수조는 제1차 이민자들이 도착하자, 그들에게 “원래 정착하기로 한 까뻥 보니뚜(Capão Bonito)는 거리도 멀고 또한 개간하는 것이 불가능한 땅이기 때문에, 자신이 임으로 미라까뚜(Miracatu)로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브라질 정부로부터 들어가서 살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 놓은 상태지만 미처 거주할 주택을 짓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로 모까(Mocca) 구(區)에 위치한 「상파울로 주립 이민수용소 (현재의 이민박물관) 」에 가서 잠시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들을 데려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제1차 한인농업이민자들이 지낸 시간은 한 달이 넘었다. 그것도 가족단위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성별로 격리된 상태에서 남녀가 따로 생활했다.

이 때 김수조와 제1차 이민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것은 김수조가 이미 브라질에 도착한 한인들로부터 대지 및 주택 건설에 드는 비용을 받아내려 했기 때문인데, 「남미공사」의 김승한 장로와 한용전 같은 사람들은 정착 후에 내도록 약속되었으니 낼 필요가 없다고 버텼다.

상훈과 추모

김수조는 이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명예영사라는 호칭을 부여받았지만, 위와 같은 잡음 때문에 나중에 취소되었다. 이에 실망한 그는 (또 다른 이민 사업을 시작하려 했는지) 북한과 접촉했다. 그리고 1963년 이북을 방문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브라질 한인사회와 한국정부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평소에 과묵한 성격이었다고 평가받는 그가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언급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수립이후 최초의 공식이민이라는 브라질 이민을 성사시킨 장본이라는 점에서 그의 활동과 공적을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 알의 밀알이 죽어 그 싹을 피우는 것처럼” 자신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브라질 한국 이민의 문호를 열어서, 남미 한인 이민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제1차 농업이민의 브라질 도착과 관련하여 일어난 여러 복잡한 문제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인색한 편이다.

참고문헌

『아마존의 꿈: 브라질 한국인 이민 40년 회고』(오응서, 남미 동아일보사 : 상파울로, 2004)
『브라질의 한국이민』(전경수, 서울대학교출판부, 1991)
『송암 문학전집』(이인길, 브라질 한국일보사 : 상파울로, 1983)
「이야기 브라질 한국이민사 : 전 보사부 차관 한국진과 초기 이민자 고광순을 중심으로」(최금좌,『포르투갈-브라질 연구』5-2, 한국 포르투갈-브라질학회, 2008)
「1960년대 남미 농업 이민 :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손정수, 『재외동포사총서』, 국사편찬위원회, 2007)
「삼바 춤을 출 수 없었던 재브라질 한인 교포사회」(최금좌,『국제지역연구』4-2,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2000)
「브라질의 한국이민과 그 전개과정」(전경수,『재외한인연구』창간호, 재외한인학회, 1990)
「남미 이민의 현실적 과제」(해외교포문제연구소,『교포정책자료』18, 1978)
「브라질편」『한국유이민사』(下)(현규환, 삼화인쇄(주)출판사, 1976)
「이민의 전망과 과제」(해외교포문제연구소,『교포정책자료』16, 1973)
「브라질이민의 현황과 문제」(해외교포문제연구소,『교포정책자료』8, 1969)
『Journal Paulista(일본 신문)』(상파울루, 1956. 2. 7.)
집필자
최금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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