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코리아타운은 상파울루 시정부(市政府)가 한인들의 1970-1980년대 생활터전이었던 봉헤찌로(Bom Retiro) 구(區)가 1990년 브라질 시장개방정책과 1998년 브라질의 경제위기로 한인들의 주거지로 변모한 것에 주목하고, 2010년 ‘상파울루 시내 한인지역(Bairro Coreano em São Paulo)’으로 명명하면서 한인사회에서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브라질의 최대도시인 상파울루 시내 중심가 북부에 위치한 봉헤찌로(Bom Retiro) 구(區)는 한국의 동대문 시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브라질 최대 패션의 메카이다. 이곳에서 여성의류시장을 장악한 브라질 한인 상인들은 브라질 전역에 물건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브라질 남부의 이웃 국가들 - 파라과이 우루과이 볼리비아 그리고 아르헨티나 - 과 더 나아가 중미의 국가들, 그리고 멀리 아프리카의 앙골라에도 물건을 공급하고 있다.
봉헤찌로는 1990년대 이전까지 한인들이 여성의류를 생산하거나 판매하는 생활터전의 역할을 한 곳이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의 1990년 시장개방 정책과 1998년 브라질의 경제위기로 봉헤찌로는 한인들의 주거지를 겸하게 되어, 오늘날 명실공이 한인들의 지역이 되었다. 따라서 봉헤찌로 입구에 위치한 루스공원(Parque de Luz)에서 한인들이 아침 운동하는 모습으로 마치 한국을 연상케 한다.
‘봉 헤찌로(Bom Retiro)’의 원래의 뜻은 ‘좋은 은둔처’ 혹은 ‘좋은 휴식처’이다. 그 이유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브라질에 가장 큰 부(富)를 안겨 준 커피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별장을 겸한 주말농장을 갖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봉헤찌로(Bom Retiro)는 19세기 초만 해도 타만두아티(Tamanduati)강과 두 개의 강 지류 ― 안냥가바우(Anhangabaú)와 이토로로(Itororó) ― 사이에 위치한 삼각지였다. 그런데 19세기 중반(1828-1872년 사이) 내륙과 연결되면서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 새로 난 도로를 따라 들어선 것이 상파울루의 상류층들, 즉 대부분이 커피 대농장주들의 별장을 겸한 주말농장이었다. 하지만 봉헤찌로는 저지대이기 때문에 비가 조금이라도 세게 오면 티에테 강(Rio Tiete)이 자주 범람하는 침수지역이다.
19세기 상파울루 시정부(市政府)는 도시 확장 계획의 일환으로, 봉헤찌로 구(區)의 개발을 인근의 루스(Luz), 캄포스 엘리제우스(Campos Eliseos), 산타 이피제니아(Santa Ifigenia) 구(區)의 개발과 동시에 시작했다. 이것은 상파울루 주정부(州政府)가 커피의 생산과 수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1869년 상파울루 내륙지역과 산투스 항구를 연결하는 철도의 건설과 1872년 ‘루스역’의 준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 루스역의 준공은 브라질의 경제성장과 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이어졌는데, 이 때 봉헤찌로에는 주택지, 상업지 그리고 소규모의 공장과 상점들이 들어섰다. 나중에 건설된 주엉 테오도루(R. João Teodoro) 도로가 봉헤찌로와 브라스(Brás) 구(區)를 연결하면서, 봉헤찌로 구(區)의 상업지역은 자연스럽게 그곳까지 확장되었다.
봉헤찌로가 1960년대까지 공업단지와 상업단지로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공업단지로서 가져야 할 필수조건 ― 교통, 낮은 지대 그리고 산토스항(港)을 통해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값싼 노동력 ―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모자공장, 우산공장, 의류공장, 빵·음료 및 식품 제조공장, 안냐이아(Anhaia) 방직공장, 그리고 프로그레수(Progresso) 맥주공장과 베인하트(Beinhert) 맥주공장 등이 들어섰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이와 같은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대신 유대인과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소수 민족들이 주도하는 소상인 중심의 의류업, 패션산업, 직물산업, 편물산업이 대체·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공업단지로 개발되었던 봉헤찌로는 1960년대 의류업의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1930년대부터 이 지역에 진출했던 유대인들(성인 의류 전문)과 일본인들(아동복 전문)의 경제활동 때문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말 한인들이 집단농업이민자로서 농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도시 상파울루의 봉헤찌로 구(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한인들 대부분이 종사하는 여성의류 제조업 “제품”은 봉헤찌로 구(區)뿐만 아니라 아랍인 지역으로 알려진 브라스 구(區)까지 확장되어, 오늘날 각각 한국의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으로 비유되고 있다.
오늘날 브라질 한인사회는 브라질 직물생산의 40%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봉헤찌로 상권의 65%(2,000 가게 중 1,300 가게)와 브라스(Brás) 상권의 33.3%를 장악하고 있다. 브라질 한인사회는 브라질 노동자들을 직접적으로 약 4만 명, 그리고 간접적으로 약 1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Gusmão, 2004). 이러한 현상은 브라질 한인들의 직업별 구성 ―자영업(76%), 학생(13%), 전문직(1%), 기타(10%) ― 에서 잘 들어나고 있다(외교통상부, 2009년 자료).
하지만 1990년 브라질 정부의 시장개방 정책과 1994년의 헤알 정책(Plano Real)이전까지 이 지역 상가 및 주거지의 소유주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브라질의 화폐가 안정됨에 따라서 20세기 말부터 한인들은 브라질에 정착하며, 부동산을 매입하고 있다.
상파울루 시정부는 1950년대 도시 확장 사업의 일환으로 ‘리베르다지(Liberdade)’ 구(區)를 ‘일본인 촌’으로 명명하여 그곳의 개발을 맡겼는데, 상파울루 시정부가 두 번째로 인정한 ‘한국인 촌’은 낙후된 공업지역의 재개발과 치안문제 해결이라는 시정부의 숙제를 한국인에게 떠맡긴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