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한국인 촌’은 1970년대 초반 상파울루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이 ‘일본인 촌’ 리베르다지(Liberdade) 구(區)의 글리쎄리우(Glicerio) 거리와 꼰지 데 싸르제다스(Conde de Sarzedas) 거리 사이에 형성한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이다.
1960년대 브라질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한창 일어나고 있던 때라 도시들은 농촌의 노동력을 대대적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이 때 한인들은 브라질 농촌사람들의 향도이촌의 물결을 타고 브라질에서 가장 큰 상공업의 도시 상파울로로 이주했다. 한인들이 농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시로 이주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첫째. 그들이 원래 농민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둘째, 브라질 사회가 한창 산업화와 도시화가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초기 농업이민자들 대부분은 퇴역 군인 출신이거나 도시의 상인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중산층 출신으로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초기 한인들은 한국정부의 농업장려금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농촌의 열악한 환경과 어려움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리고 자녀교육이라는 구실로 당시 브라질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농민들의 도시로의 이주물결을 타고 도시로 이주했다. 그 결과 한국농업이민 개시 3년 만에 한국인 90%가 이미 도시 상파울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브라질 한국인 촌’은 포르투갈어로 ‘Vila Coreana no Brasil’로 ‘브라질에서 한인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인들은 이곳에서 한국의 문화나 풍습과는 전혀 다른 브라질 문화로부터 “문화적 충격”을 덜 받고, 또한 여성의류제조업 “제품”을 중심으로 구축된 생존메커니즘 안에서 선배들로부터 기술을 전수를 받게 된다. 따라서 한인들은 누구라도 - 친척이 있는 사람이든 없든, 돈을 가지고 있든 없든 - 한국동포들과의 공존을 추구하며 어김없이 이곳을 찾아왔다. 그것은 포르투갈어에 대한 무지, 거기에서 오는 상호 협력을 유지하려는 기대, 그리고 같은 동포들과 함께 공존한다는 위안 등이 한국인들을 그곳으로 모이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한국인 촌’은 리베르다지(Liberdade) 구(區)의 글리쎄리우(Glicerio)길과 꼰지 데 싸르제다스(Conde de Sarzedas) 길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브라질 한국인촌’은 오늘날에도 매춘, 범죄, 가난으로 점철된 최악의 위생 상태를 가진 지역으로 낮에도 혼자 걷기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한국인 촌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마치 피난민들처럼 가구도 없이 옷을 보따리에 넣어두고 살았는데, 그것은 언제나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할 준비가 된 사람들처럼 산 것이다.
‘한국인 촌’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가장 큰 원인은 우선 집세가 비교적 쌌고, 시내 중심가와 가깝게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교육받은 사람들의 일본어 구사력으로 브라질 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1970년대 중반 브라질 한인의 수는 약 10,000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한국인들은 ‘한국인 촌’에서 한인들만의 삶의 방식을 창출해 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혹은 배로 여행 중 들렸던 항구에서 산 물건들을 가가호호 돌며 행상으로 물건을 파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자동차를 생산하거나 혹은 그것을 갖는다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한 시절이라, 행상을 하기위해 가족 모두가 브라질 국민차인 독일 자동차 모형의 푸스카(Fusca) 타고 출근하는 광경은 장관이었다고 오응서는 증언한다 (1989년 2~5월 사이 인터뷰).
그런데 이때부터 브라질 한인교포사회의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브라질 사람들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경계심을 덜 보였기 때문에, 여자들이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물건을 파는 동안, 남자들은 자동차 안에서 아이들 우유나 기저귀를 갈면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 물건이 떨어지게 되자, 일부 한인들은 당시 브라질 일본사회에서 유행하던 미상가(miç~anga)라고 불리던 구슬 백이을 만들거나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1971년에 도착한 기술 이민자들도 곧장 상파울루의 한국인 촌으로 향했는데, 이들 속에는 일정 금액의 투자 자본을 지닌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 출신의 전문 의류업 종사자들이 섞여 있어서, 한인들의 주요 업종인 의류제조업을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1990년대 이후부터 한인들의 주거지가 봉헤찌로로 옮겨감에 따라서, 이 지역에 남아있는 한인들은 거의 없다. 단지 남아있는 것은 낡은 한인교회 몇몇과 이곳과 가까운 데에 있는 한인회관 정도이다. 참고로 대한노인회와 부인회는 한인회관 바로 옆에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