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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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인물
해방 이후 반공포로로 브라질에 이민한 교민.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지
중국 하얼빈
내용 요약

주영복은 해방 이후 반공포로로 브라질에 이민한 교민이다. 소련 군사 고문단 소속의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연합군에 체포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어 있었다. 1953년 반공포로를 사면할 때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중립국 인도로 떠났다가 제3국가로 브라질을 선택하여 정착하였다. 초창기 한국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브라질 생활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약 8만 어휘에 달하는 『포한사전』을 발간하였다. 이후 『포한사전』은 한인교포들의 브라질 사회 적응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학생들의 포르투갈어 학습에도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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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반공포로로 브라질에 이민한 교민.
개설

주영복은 1956년 2월 6일 반공포로('중립국 포로’ 혹은 ‘제3국가 선택 포로’로 부르기도 함)로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는 51명의 반공포로 중 가장 연장자(당시 33세)로 1975년 『포한사전』(성안당)을 출판하여 오늘날까지도 브라질 한인들이 브라질에 적응하는 데 그리고 포르투갈어를 학습하는 학생들에게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인물이다.

주영복은 6.25 한국전쟁 중 연합군에 체포되어 거제도 수용소에서 수용생활을 한 반공포로 중의 한 사람이다. 1953년 6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사면으로, 반공포로 88명(12명의 중공군 포함)이 남한이나 북한 어느 쪽에도 남기를 거부하고, 한국국적을 포기한 채 인천항에서 당시 중립국이었던 인도를 향해 떠나갔다.

2년 거주 조건으로 인도에 체류하던 그들은, 또 다시 자기들이 살고 싶은 제3국을 선택해야 했는데, 그들이 가장 선호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하지만 냉전시대에 그들의 희망이 실현되기는 불가능했다. 그때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같은 중남미 국가들이 예외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체되면서 그들은 멕시코를 포기하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선택해서 재이주 했다.

브라질에는 중공군 포로 5명을 포함해서 56명이 이주했고, 아르헨티나에는 8명이 재이주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브라질에 도착한 한인 포로의 수가 50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중공군에 포함되었던 한 사람이 한국인으로 밝혀짐에 따라 51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반공포로들은 1956년 2월 6일 비행기로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했다. 이 때 브라질 외무성의 입장에서는 그들과의 소통을 염려하여 일제강점기 브라질에 도착한 한인들 - 김수조 장승호 이중창 - 을 찾아내어 공항에서 그들을 맞이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반공포로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받아들인 브라질 정부와 국민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브라질 국가를 합창하기 위해 비행기 안에서 브라질 국가를 연습했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최국주의 지휘하에 브라질 국가를 불러 언론을 비롯한 브라질 사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브라질행 비행기 안에서 브라질 국가를 연습했던 것이다. 브라질 도착 이후 주영복은 다른 반공포로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민사업을 위해 정인규 단장이 이끄는 「문화사절단」 15명과 초기 농업이민자들의 브라질 생활 적응에 적극 협조했다.

생애

지금으로서는 주영복의 출생이나 성장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그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러시아어 통역장교로서 소련 군사 고문단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러시아어를 구사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은 그가 만주의 하얼빈 출신(혹은 그곳에서 성장)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그곳으로 피난 온 러시아 사람들에게서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김일성대학 출신이거나 혹은 러시아 모스코바 대학교의 유학생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60년대 초 주영복은 초기 한국 농업이민자들이 브라질에 도착할 무렵, 브라질 꾸바떵 제철소(Cubatão Usina)의 협력회사였던 일본계 니뽄 스틸(Nippon Steel)에서 일본어 번역 및 통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혈기왕성했던 반공포로 청년들은 대부분 일본계 2세나 브라질 여인들과 결혼했지만, 그는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고 총각으로 남아있었다.

그는 한국의 사진 신부(Picture Bride)와 결혼했는데, 그의 결혼에 대해서 2014년 현재 뉴욕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을 하고 있는 초기 브라질 이민자 연봉원(延峰原, 1942년 10월 10일생, 강원도 홍천 출신. 1964년 3월 5일 떼젤베르그(Tegelberg)호로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 미국으로 재이주하여 1998년 보스턴 대학 로스쿨(Boston University Law School)에 입학했다)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당시 그는 총각이긴 했지만, 뻐드렁이에 머리카락도 많이 빠져서 나이보다도 훨씬 늙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국교민 중 한 사람이 그가 결혼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서인지 혹은 그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한국여인을 중매했습니다. 그녀 역시 형제가 많은 가난한 집안의 딸이라 그때까지 노처녀였기 때문에 그와의 결혼을 쉽게 결정했다고 생각됩니다.

주영복 씨는 당시 브라질 시민권을 이미 취득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브라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위임장에 의한 결혼(o casamento de procuração)" 서류를 보냈습니다. 그 서류를 받은 여인은 일본 요꼬하마 소재의 브라질영사관에 가서 영주비자를 받고, 1963년 초 깜삐나스(Campinas)의 비오라꼬뿌스(Vioracopos)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몇몇 한인들이 주영복 씨와 함께 공항에 나갔는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던 신부와 밑에서 기다리던 신랑이 동시에 실망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 소리를 그와 함께 공항에 마중 나갔던 고광순 씨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대면한 신랑 신부가 서로 실망했던 것이지요. 신부는 신랑이 사진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고, 신랑은 신부의 인물이 사진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어째든 주영복 부부는 당시 ‘한인촌’이 형성된 꼰지 데 사르제다스(Conde de Sardas)거리의 작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그리고 자식들도 낳으며 그곳에서 1980년대 후반까지 살았다. 이때 그와 그의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미국으로 재이주했는데, 그가 한인촌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서 오래 살았다는 사실은 그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으로의 재이주는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던 처형의 초청으로 가능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는 미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너무나도 나이든 늙은 노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노동직의 일자리로도 만족해야 했는데, 그 당시 그가 얻은 일자리는 어느 건물의 야간 수위였다.

이때 그는 밤을 세워가며 자신의 과거의 삶에 대한 원고를 탈고했다. 그리고 그 원고를 KBS에 보냈고, 1989년 KBS 6 · 25 특집 다큐로 방송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 원고는 『내가 겪은 조선전쟁』 I권과 II권으로 출판사 고려원에서 1990년과 1991년 각각 간행되었으며, 또한 『76인의 포로들』이라는 제목으로 1993년 대광출판사에서도 간행되었다.

활동사항

주영복의 가장 큰 업적은 아마도 1975년 약 8만 어휘에 달하는 『포한사전』의 발간일 것이다. 그가 포르투갈어-한국어 사전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1963년 제1차 한국 농업이민이 브라질에 도착한 것을 보고, 초창기 한국이민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브라질 생활에 적응하는 데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광순은 1960년대 교민회가 그에게 사전작업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없다.)

어쨌든 그는 이 사전 집필을 위해서 포르투갈어-영어 사전, 포르투갈어-일본어 사전, 그리고 영어-한국어 사전을 참고했다고 서문에 쓰고 있는데, 직장생활과 병행하면서 주로 밤에 작업을 했기 때문에 10년 이상이 걸렸다고 밝히고 있다. 이 원고는 1972년에서야 탈고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보다 한국어에 능한 연봉원 변호사와 같은 초기 한인지식인들이 교정 작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가 원고를 완성한 후에, 한국의 출판사에 출판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관심을 보인 출판사는 없었다. 그만큼 포르투갈어-한국어 사전에 대한 수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의 한국일보 남미지사 지사장인 홍갑표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당시 한국의 「해외교포 문제연구소」 소장이었던 문인구(文仁龜) 변호사에게 의뢰했다. 그의 소개로 1975년 성안당(이종춘 사장)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사전에 대한 판권을 포기하고, 모든 권리를 출판사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 사전은 1970년대 당시 수 만 명의 브라질 한인교포들의 브라질 사회 적응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 학생들의 포르투갈어 학습에도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아직까지 그의 사전을 능가하는 것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전에 대한 수요는 아직까지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The Origin of Korean War라는 책을 쓴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시카고 대학교 교수, 한국인 여인과 결혼)는 6 · 25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은 남한이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며,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1980년대 초반 주영복의 주장 - 소련의 군사 고문단에서 자신이 한 일은 소련의 남침계획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 - 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적이 있다.

참고문헌

『76인의 포로들』(주영복, 대광, 1993)
『브라질의 한국이민』(전경수, 서울대학교출판부, 1991)
『내가 겪은 조선전쟁』Ⅲ(주영복, 고려원, 1991)
『내가 겪은 조선전쟁』I(주영복, 고려원, 1990)
「브라질 이민사―브라질 한인교포사회의 조명―」(최금좌,『외교』54, 외교통상부, 2000)
「무지개를 넘어서: 브라질 한국 이민사」(Choi, Keum Joa, 상파울루 주립대학교 역사학과 석사논문, 1991)
「브라질의 한국이민과 그 전개과정」(전경수,『재외한인연구』창간호, 재외한인학회, 1990)
집필자
최금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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