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삼남지방의 향곡을 순회하며 공연할 목적으로, 김창환이 강용환 ․ 김채만 ․ 유성준 ․ 김정길 ․ 안영환 ․ 정학진 등 50여 명의 전라도 출신의 명창 대가를 규합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였다. 주요 활동 지역은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지역으로, 상연 종목은 창극․ 판소리․ 줄타기․ 고전음악․ 기생가무 등 다채로웠다. 1910년 8월 해산하였다.
판소리를 중심으로 전통 예술의 지방 순회공연을 위해 설립하였다.
일제는 재정 궁핍의 이유를 내세워 한국 정부의 모든 정부기구를 축소 또는 폐지시켰고, 이에 따라 1906년 제1차로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일컬어지는 협률사를 강제로 폐쇄하고 협률사 건물을 군인회관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명창들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채 연고지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김창환 역시 고향 나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김창환은 한시라도 활동을 멈추는 것은 예술인의 본분과 긍지를 망각하는 소치라 여겨, 이듬해인 1907년 삼남지방의 향곡을 순회하며 공연할 목적으로, 강용환 ․ 김채만 ․ 유성준 ․ 김정길 ․ 안영환 ․ 정학진 등 50여 명의 전라도 출신의 명창 대가를 규합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였다.
김창환협률사는 향곡을 누비며 공연 활동을 하다가, 1910년 8월 경상도 남해에서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고 그날로 해산하였다.
김창환협률사의 주요 활동 지역은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지역으로, 상연 종목은 창극 ․ 판소리 ․ 줄타기 ․ 고전음악 ․ 기생가무 등 다채로웠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1900년대 말 침체되었던 공연 문화를 활성화 하였다.
‘김창환협률사’에는 여성 창자가 없어 춘향가나 심청가와 같은 창극을 제대로 공연할 수 없었다. 이에 강용환은 남창만으로 연행할 수 있는 「어사와 초동」을 창작하였다. 「어사와 초동」은 춘향전 중 이도령이 어사가 되어 다시 남원으로 내려오는 길에 방자를 만나는 대목을 중심으로 개작한 것이다. 또한 변강쇠타령을 창극화하여 공연하기도 하였는데, 새로운 창극 개발은 창극 레퍼토리의 확대 및 발전에 공헌하였다.
당시 협률사 공연은 무대장치와 대소도구는 없었고, 배경으로 둘러친 백포장(白布帳)앞에서 백전구(白電球)를 천정에 밝히고 연행하였으며, 전기 없는 지방에서는 횃불을 밝혀 놓고 공연하였다. 한 장소에서 가설 무대를 설비하면 3∼5일간 흥행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1906년 일제에 의해 협률사가 폐지된 이후 주춤하였던 전통 연희 공연을 활성화시켰고, 이를 통해 판소리 ․ 창극 등 전통 연희의 발전과 저변 확대에 기여하였다. 특히 강용환의 새로운 창극 개발은 창극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