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평안남도 개천(介川) 출생으로, 1938년 일본 니혼대학교[日本大學敎] 전문부 경제학과를 중퇴하였다.
1946년 월남하였으며, 동년 민족통일총본부 정경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7년에는 서북청년회 총본부위원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1948년에는 『평화일보』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대한청년단 부단장직을 맡았다.
1951년 주일 교포지도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952년에는 자유당 중앙당 선전부 책임위원 및 정무국 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9월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53년 12월 자유당 중앙당 청년부장, 1954년 자유당 선전위원회 위원, 정책위원, 훈련부장직을 수행하였다.
1955년 2월 초대 국무원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어 1957년 6월까지 재임하였고, 바로 이어 이종림 장관의 후임으로 제6대 교통부 장관에 임명되어 장관직을 수행하다가 1958년 9월 사임하였다.
교통부 장관 사임 후, 1959년 2월 대한반공단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동년 5월 대한반공청년단 지도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9월에는 조만식이 당수로 있던 조선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임명되었다.
1960년 4·19 혁명 후, 김구 암살사건의 재수사 과정에서 ‘김성주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아 구속되었다가, 3년 후 최종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1967년 자유당 중앙당 선전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밖에 국제라이온스클럽 한국지부 사무총장,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대일화학공업 감사,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 실향민호국운동 중앙협의회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1992년 6월에는 민족통일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1998년 4월에는 대한민국 건국5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명예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2004년 10월 20일 향년 90세로 사망하였으며, 상훈으로는 화랑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황조근정훈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