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경기도 여주 출생으로, 호는 ‘여주의 바위’란 뜻의 여암(驪巖), 본관은 경주이다. 동성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 대경상업고등학교로 전학해 1959년 졸업했다. 경희대학교에서 체육학과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으며, 재학 시절 총학생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64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교(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 대학원과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1997년 경희대학교에서 「남북체육교류의 통합기능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제강 공동설립자인 김인성의 사위로 서울제강 상무로 재직하다 정치에 입문해, 1971년 2월 공화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71년 5월 공화당 최연소 전국구 후보로 지명되었다. 1972년 2월 공화당 청년분과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1972년 10월 유신을 지지하는 ‘4·19세대’ 45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1975년 공화당 청년분과위원장이 되었고, 1976년 5월 차지철의 후임으로 공화당 성남·여주·광주·이천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성남·여주·광주·이천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81년과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여주·이천·용인 지역에서 제11∼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제11∼12대 국회에서 상임위원회 상공위원장, 민주정의당 총재비서실장, 한국·터키의원친선협회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민주정의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여주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제13대 국회에서는 4선 의원으로서 내무위원장 및 민주정의당 원내총무를 역임했으며, 1990년 3월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남북통일 축구대회 총 인솔단장으로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5선을 노렸으나 낙선했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여주군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이밖에 독립기념관 이사, 천주교 대건회 회장, 경희대학교 총동문회 제19대 회장, 한국사학법인연합회 제19대 회장, 한국전문대학법인협의회 제8대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교육사업에도 참여해 세종장학회 이사장, 동신교육재단 이사장, 여주대학 설립자겸 이사장, 학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1999년 8월 5일 숙환으로 사망했으며, 상훈으로는 4·19 유공 대한민국 건국포장, 청조근정훈장이 있고, 미국 루이지애나침례대학교(Louisiana Baptist University) 명예 교육학 박사,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박사, 뉴욕하우톤대학(New York Houghton College) 명예 법학 박사, 경희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은바 있다. 저서로는 『한글세대론』, 『정의의 길』, 『조국을 위하여』, 『국민정치시대』, 『스포츠와 정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