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74.5㎝, 가로 210.5㎝. 현등사 수월관음도는 2011년 보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복장(腹藏)의 「관음원문」으로 제작 연대와 화승, 발원자, 발원 내용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즉 왕대비 조씨가 1849년 23세의 나이로 죽은 아들 헌종의 극락왕생과 두 며느리의 수명장수 등을 위해 이듬해 상궁들을 현등사에 보내 불화를 조성하고 불상을 중수하는 불사를 하는 중에 제작된 작품인 것이다. 발원문에는 또 “해수관음탱”이라 명기하였는데, 이 명호는 조선 후기에 관음보살의 별칭이었던 사실을 몇몇 작품과 기록에서 알 수 있다.
현등사 수월관음도는 화면 구성과 도상에서 매우 이색적인 작품이다. 암좌에 왼쪽 무릎을 세우고 편안하게 앉아있는 관음보살 옆으로 괴석과 정병이 배치되고, 정병에 꽂혀있는 버들가지에 관음조가 날아드는 것은 조선 후기 수월관음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새는 두 마리이며 정병은 편병 형태로 몸통에는 팔괘가 태극 문양 둘레로 시문되어 있다. 19세기 수월관음도에는 다양한 형태의 정병이 나타나지만 이 같은 기형과 문양을 한 정병은 찾기 힘들다. 더욱이 정병의 가늘고 긴 목에는 “관심수(觀心水)”라는 명문까지 있어 그 의미가 심상찮아 보인다.
화면은 수파 위를 가로지르며 걸쳐있는 구름으로 상단과 하단을 구획 짓고 있다. 구름 위에는 사천왕이 일렬로 서있는데 사천왕 도상이 관음도에 등장하는 예는 거의 없으며, 보관을 비롯한 복식과 지물에서 중국 판화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화면 상단에는 관음보살을 둘러싸고 있는 대원광 바깥으로 백의관음 형상을 한 화신들이 나타나 있다. 이 도상은 중생 구제를 위해 여러 방편으로 현신하는 관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화면 하단에는 짙푸른 바다의 넘실대는 물결 위에 선재동자가 합장하고 서있으며, 화면 좌우로 네 용왕이 화염보주와 홀, 용뿔 등을 들고 서있다. 용왕들은 선재동자보다 더 크게 부각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며, 선재의 천의 표현 또한 색다른 모습이다. 조선 후기 수월관음도에서 선재동자와 용왕이 대칭으로 짝을 이루는 것은 상례이지만, 사해 용왕이 등장하는 것은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이들 도상은 1907년에 조성된 보문사 수월관음도에 계승되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봉(道峰)의 관음보살초본에도 표현된다.
퇴은당 유경, 송암당 태원, 월하당 세원, 창엽 등은 이 관음도를 제작한 화승들로서, 이들은 1861년 화계사 불화 조성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 중에서 유경을 비롯한 세원과 창엽 등이 제작한 칠성도가 현등사에 옮겨져 봉안 중인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현등사 수월관음도의 발원문에 기록된 “해수관음”이라는 명호가 조선 후기 관음보살의 별칭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세 구복과 더불어 내세구제를 염원한 관음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관음 화신을 비롯하여 사천왕과 사해 용왕 도상 등으로여타 조선 후기 관음도와 차별화되는 독톡한 화면 구성은 주목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