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3월 20일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만연리 출생으로, 본관은 밀양, 호 일우(一愚)이다. 전라남도 화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화순금융조합장을 지냈고,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화순군지부 총무위원, 대한국민회 화순군지부 사무국장, 화순중학교 후원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5년 민주당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57년에는 민주당 전남도당 화순지구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9년 9월 민주당 전남도당 제5차 대의원대회에서 전남도당 임시집행부 부위원장에 당선되었으며, 전남지역 대표자격으로 농업은행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로 헌법이 개정되어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화순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로 활동하며,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발의된 부정선거 원흉 및 부정축재자 처단,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제한 등에 관한 특별법의 공동제안자로 참여했다.
1961년 5월 4일에는 장면 정권 하에서 제15대 상공부 차관에 임명되었지만, 5·16군사정변으로 5일 만에 실각했다. 1963년에는 민주당 중앙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이자 기획위원회 재정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후 1965년 민주당과 민정당이 통합해 창당한 민중당의 중앙상무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69년 7월에는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71년 윤보선, 장준하가 이끄는 국민당 창당에 참여해, 정무위원 겸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동년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소속으로 전라남도 곡성·화순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975년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남도지부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87년 6월에는 4·13호헌조치 철회 전·현직 국회의원 성명에 참여했다. 1996년 5월 광주·전남지역 송죽회 회장으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16주기를 맞아 재평가와 복권을 촉구했으며, 독립지사 지강(芝江) 양한묵(梁漢黙) 선생 현창사업추진위원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2005년 4월 9일 숙환으로 사망했으며, 5·18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