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경만(敬萬)이다. 1867년(고종4)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면에서 출생했다. 불경(佛經)을 배워 염불을 하다가, 하루는 진주 촉석루에서 얼핏 잠이 들었는데 하늘에서 노래소리가 들리더니, “석가모니 부처는 지나간 부처이니 염불을 그만하고, 이제부터 너는 천선생(天先生)을 찾아 모시도록 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 뒤부터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중국까지 다니며 천선생을 찾아 다녔는데, “당신이 찾는 천선생은 조선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국하였다. 그 후, 1907년 증산(甑山)을 만나 그의 종도(宗徒)가 되었다.
1909년 증산은 안내성에게 『현무경(玄武經)』과 흰 병을 주면서, “이 자리를 3년간 떠나지 말고 앉아서 『태을경(太乙經)』을 읽으라.”고 하였으므로 그 뒤 증산이 사망한 줄도 모르고 가난한 속에서도 3년간 수련을 계속하였다.
1911년 수련을 마치고 고부인(高夫人: 본명 高判禮)이 선도교(仙道敎)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으나, 차경석(車京石)과 뜻이 맞지 않아 1913년 여수 가국리에서 교당을 창설하였다.
1927년에는 전주군 우림면 청도리(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백운동으로 본부를 옮겨 전국에 있는 신도들 수백 명을 이주시켜 교인촌을 형성하였다. 그는 자기가 증산의 수제자이므로 증산으로부터 새 시대의 운수를 조종하는 능력을 받았다고 하고, 일심으로 수도하면 멀지않아 증산이 환생하여 큰 복을 주리라고 하면서 신자들에게 주문 한 가지씩을 주고 기한을 정하여 읽게 하되, 그 기한이 끝나면 다른 주문을 주면서 수련을 시켰다.
1929년 보천교를 탈퇴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한때 교명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로 바꾸기도 했는데, 이 무렵 신도수가 3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 뒤 교당이 점차 위축되다가, 1949년 사망했다. 안내성이 창립한 선도의 신앙대상은 천선생 즉 천황·지황·인황으로서의 증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