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1년(영조 47) 1월 5일에 영조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의 옛 터에 행차하여 조참(朝參)을 시행한 후, 신하들에게 내린 훈유(訓諭)의 글이다. 자신의 부덕(不德)을 반성하고 신료들이 붕당(朋黨)을 지어 아부하고 반목하는 악습(惡習)에서 벗어날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영조가 훈유(訓諭)의 글을 내린 후 교서관(校書館)의 사자관(寫字官)이 그 내용을 홍무정운체(洪武正韻體)로 필사하였고, 다시 이를 목판으로 제작하여 인쇄했으며 판목은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인쇄한 책은 3건을 내입(內入)하고 1건을 세손에게 올렸으며, 5곳의 사고와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 봉조하(奉朝賀), 종신(宗臣), 시종신(侍從臣) 등에게 1건씩 배포하였다.
1책. 목판본. 책 크기는 세로31.2㎝ 가로 20㎝이고, 반엽광곽(半葉匡郭) 크기는 세로 22.3㎝ 가로 15.2㎝이다. 본문의 행자수는 6행 12자이고, 판심(版心)은 상화문어미(上花紋魚尾)로 되어 있다.
「어제근정훈유」와 「소발(小跋)」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제근정훈유」는 첫 머리에 ‘조참 시에 대소신료에게 훈유한 글(朝參時 諭大小臣僚文)’이라고 쓰여 있다. 이 글에서 영조는 국초에 조참을 시행하던 곳에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조참을 실시하니 마치 조종(祖宗)의 선왕들과 그 당시 신료들의 영령이 이곳에 임한 것 같다고 하였다. 이어서 영조는 지금의 조정 관원들이 선왕들을 섬겼던 선조(先祖)들의 뜻을 생각한다면 붕당(朋黨)을 지어 서로 편드는 마음, 근거 없이 비방하는 습관, 불화하고 반목하는 풍조 등의 잘못된 풍습을 마땅히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행하지 않는 이는 선조의 뜻을 잃어버린 사람이므로 임금을 섬길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소발」은 영조가 내린 전교(傳敎)를 기록한 것이다. 「훈유」 내용을 조보(朝報)에 수록하는 정도에 그치지 말고 필사본과 간본(刊本)을 제작하여 조정 관원들과 종친들에게 널리 배포하도록 지시하였다. 끝 부분에 이 전교 내용도 간본에 포함하도록 명한 내용이 실려 있다.
탕평의 지속적 추진과 조정 기강 확립을 추구했던 영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