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교회 여성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선교 단체이다. 1897년 10월 31일 조직된 정동제일감리교회(미국 북감리회) 엡웟청년회 여성지회인 조이스회에서 태동하여 1900년 11월 11일 창립된 보호여회를 거치며 성장했다. 뒤이어 남감리회 교회에도 여성들의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선교단체가 조직·확장되었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남·북감리회의 여선교회 조직은 1931년 6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로 통합되었고, 1954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로 공식화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역사는 미국 북감리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한국 선교로 시작되었다. 미국 북감리회의 주1을 받은 첫 한국 선교사들은 1885년 서울 정동에 안착하여 선교 사업 개척에 나섰다. 여성 사업은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이 1886년 5월 31일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열면서 본격화되었다.
1887년 10월 한국의 첫 감리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조직되었지만 시대적으로 남녀가 한 공간에서 예배드리기 어려운 제약이 있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자신의 사택이나 이화학당 교실에서 여성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여성 집회에는 이화학당 학생뿐 아니라 외부의 여성들도 참석하면서 출석 인원이 남성 집회의 평균 참석 인원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기독교 복음 수용과 실천력은 1894년 정동의 남녀 교인들이 남녀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당 건축을 결의했을 때 여성 교인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건축 헌금을 낸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1895년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자리에 벧엘 주2 건축이 시작되어 1897년 가을에 완공되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 창설된 감리교 청년단체인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를 따라 한국의 감리교회 안에서도 청년회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정동제일교회에서는 1897년 10월 31일 남녀 청년들이 각기 청년회를 조직했는데, 이때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 그리고 정동제일교회 한국인 여성 교인 모두 11명의 회원으로 엡웟청년회 여성지회인 조이스회(Joyce Chapter)가 주3. 조이스회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 단체로, 초기부터 선교 주4과 여성 교육 및 주5에 집중했던 자율적인 여성 조직으로서 한국 감리회 여선교회의 모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00년 11월 11일 보호여회(保護女會, Ladies Aid Society)가 창립되었다. 정동제일교회의 여성들은 1900년 가을, 담임 목사 아펜젤러(Alice 주6의 안식년 휴가를 앞두고 돈을 모아 단체 사진을 찍어 선물하게 되었다. 여기서 모은 돈의 일부를 여성 교인들 가운데 가난한 자를 돕는 데 쓰기로 하면서 보호여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초대 회장으로 여메례(余袂禮)가 선출되었다. 조이스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정동교회에서 여성 지도력을 발휘하던 여메례가 보호여회 창설의 주역이었으므로 조직과 인원에서 보호여회는 조이스회의 연장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보호여회의 창설 이후에도 조이스회는 계속 유지되었는데, 조이스회가 청년과 학생층 중심이었다면, 보호여회는 장년층 중심이었다.
28명으로 창립된 보호여회는 매월 1회 정기 집회를 갖고 가난한 여성들을 구제하는 사업과 함께 전도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면서 회원들의 친교와 교육 사업도 병행했다. 정동교회 보호여회를 따라 1903년에는 평양 남산현감리교회에서, 1910년대 초반에는 서울의 동대문교회와 상동교회에서도 보호여회가 조직되었다.
미국 북감리회보다 10년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한 남감리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경우 1905년 개성에서 처음으로 교회 여성들의 자치 조직이 탄생하였고, 그 후 원산으로도 확대되었다. 3·1운동 이후 개체 주7 혹은 지방 단위로 흩어져 있던 조직들을 체계화하게 되는데, 남감리회는 1920년 12월 6일 전국 단위의 ‘여선교대회’를, 북감리회는 1924년 9월 15일 전국 단위의 ‘내외국여선교회총회’를 조직했다. 1930년 12월 2일 남북감리교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창립함에 따라 내외국여선교회 총회와 여선교대회는 1931년 6월 3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로 통합 및 조직되었다.
여선교회는 주8 말기부터 한국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존폐의 위기를 맞기도 하고, 감리교 본부의 산하 주9에 편입되어 주체적 활동이 크게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1953년 3월 18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 ‘여선교회’라는 이름을 되찾으며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기구로서 조직을 정비할 수 있었다. 여선교회의 전국 조직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는 1954년 발행된 감리교 장정에 기록됨으로써 공식화되었다.
1960~1980년대를 거치면서 크게 성장한 여선교회는 국내에서 해외로, 교회 너머 사회로 선교의 지평을 열어나갔다. 1979년 미국 감리회 선교부 건물(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 1동 36의1)을 매입하여 여선교회관을 개관했고, 1991년 그 자리에 교회 여성들의 헌금으로 현재의 건물을 완공했다. 1998년 제주도에 건립한 여선교회 100주년 기념 연수원은 여선교회원들의 수련과 교제의 공간으로 활용되다가 2015년 폐쇄되었다. 제주도 연수원의 매각 대금 전액은 은퇴한 독신 여교역자들이 안락한 여생을 보내도록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안식관 건축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여선교회는 정릉 부지에 1956년, 1984년에 이어 2020년 3번째 안식관 건물을 완공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 감리교회 여성들이 조직하고 자치 · 자립 정신에 입각하여 선교 활동과 구제 사업, 여성 교육과 계몽 운동에 집중했던 선교 단체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근대의 선구적인 여성 조직이며 개신교 최초의 여성 단체인 여선교회의 정체성과 선교 정신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