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년(순조 20)에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충렬공(忠烈公) 강수남(姜壽男, 1552∼1592)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처음에는 어강사(漁江祠)로 창건하였다가 어강서원(漁江書院)으로 승원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설되지 못하였다.
1820년에 강수남을 제향하기 위하여 진양강씨 후손들이 옛 어화정곡(漁火井谷)에 건립한 문중서원이다. 서원이 훼철된 후 서원에 보관하던 문헌들은 189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어강서원 구허(舊墟)에 1870년(고종 7)에 우모재(寓慕齋)를 건립하여 강수남의 고조할아버지 청풍군수(淸風郡守) 강혜(姜徯, 1424∼1485)와 증조할아버지 강효정(姜孝貞), 종숙 모암(慕庵) 강우(姜瑀, 1495∼?)를 향사하고, 1992년에 중건하였다. 강수남은 그의 10세손 강봉호(姜鳳浩)가 1909년 의령군 용덕면 소상리 돈대산에 사월정(沙月亭)을 중건하여 매년 3월 15일에 제향하고 있다.
강수남은 자가 인수(仁叟), 호는 사월정(沙月亭)이며, 본관은 진양(晋陽)이다. 진사 강서(姜瑞)의 아들인데, 강서는 남명 조식의 문인이었으며, 효행으로 정문(旌門)을 받았다. 강수남 역시 남명의 문인이 되었으며, 1580년(선조 1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도 관찰사 심대(沈岱)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삭녕 전투에서 가노(家奴) 검산(檢山)과 함께 전사하였다. 선조는 특명으로 승정원 도승지를 추증하는 한편, 정려(旌閭)를 내리고 종 검산을 복호(復戶)하였다. 1709년(숙종 35) 중신들의 주청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의 증직과 충렬(忠烈)의 시호가 내려졌다. 1712년(숙종 38)에도 중신들의 주청에 의해 경기감사 심대와 똑같은 예우로서 「일체정려(一體旌閭)」 네 글자의 어필(御筆)을 하사하였다. 이어 1791년(정조 15)에는 다시 삭주(현 경기도 연천)의 표절사(表節祠), 1820년에는 의령의 어강서원에 배향하였다.
서원 훼철 이후 재실과 누정의 형태로 분화하여 추모하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