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촌서원 ()

유적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에 있었던 조선후기 심광세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이칭
이칭
유월사(柳月祠)
정의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에 있었던 조선후기 심광세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개설

1709년(숙종 35)에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연루되어 고성(固城)으로 유배왔던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 1577∼1624)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1842년(헌종 8)에 고성지역의 임진왜란 의병장이었던 이달(李達)을 도산서원(道山書院)에서 이봉(移奉)하였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설되지 못하였다.

역사적 변천

현전하는 유촌서원 자료들은 후대에 기록된 것이어서 건립 연대와 명칭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자료를 정리하면 유촌서원이 1699년(숙종 25) 유월리(柳月里)에서 유월사(柳月祠)라는 사우로 창건된 이후 1709년에 건물의 중수를 거쳐 서원으로 승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 고성지역에서는 17세기 이래로 유력 가문을 중심으로 문중서원과 사우의 건립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내용

인조반정과 갑술환국을 거치면서 영남지역 특히 경상우도에서의 사환(仕宦)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사족 사회의 정치적 분립과 신분 내 분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특히 고성지역은 임란을 겪으면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곳이었기에 전란 이후 사회·경제적 정도에 따라 분화가 극심히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향촌 내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서인 내지 노론화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서인의 핵심 세력이었던 청송심씨(靑松沈氏)와의 연대를 위해 고성에 유배 왔던 심광세를 제향하는 서원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서원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자들도 고성에 거주하는 서인계 내지 새롭게 사족이 된 신향(新鄕)들로 추정된다.

1842년에는 도산서원에 제향되어 있던 이달의 위패를 옮겨와 봉안하였는데, 이것은 도산서원이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중서원으로 변모하였기 때문이다. 이달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전주최씨로 임진왜란 당시 외종숙인 최균(崔均), 최강(崔堈)과 창의하였다.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고, 양산군수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도산서원에 최균, 최강 형제와 함께 제향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고성지역 내 기득권을 둘러싼 각 가문 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결국 위패를 옮기게 되었지만, 이달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의형을 제향하는 곤의서원이 아닌 유촌서원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함안이씨들이 퇴계로 대표되는 남인이 아닌 노론계로의 전향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19세기 초반 대표적 세도가문이었던 청송심씨 내지 노론계 지방관에 힘입어 다른 가문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취한 조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서인계 서원이 영남학파로 대별되는 남·북인계 지역에서 창건 유지되어 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서원이다.

참고문헌

『교남지(嶠南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서원가고(書院可攷)』
『서원지총서(書院誌叢書)』
『전고대방(典故大方)』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영남사림파의 형성』(이수건, 영남대학교출판부, 1979)
「고성지역 재지사족의 형성과 발전」(장동표, 『남명학파와 영남우도의 사림』, 예문서원, 2004)
「도내각읍서원훼철사괄성책초」(이우성 편, 『서벽외사해외수일본총서』15, 아세아문화사, 1990)
집필자
이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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