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승려인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시와 게송 등을 모은 시집으로,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목우자(牧牛子)는 지눌이 스스로 붙인 호이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소백산을 유람하고 쓴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도 지눌의 시집이 언급되고 있다. 즉 “(소백산에는) 동가타암(東伽陁庵)이 있는데, 종수(宗粹)가 말하기를, ‘희선장로(希善長老)가 처음으로 여기에 살았고, 그 뒤에 보조국사가 여기에서 좌선수도(坐禪修道)하여 9년 동안을 밖에 나가지 않고, 스스로 호를 목우자라 하였습니다. 시집이 있는데 제가 일찍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이 빌려 갔습니다.’라고 하며, 몇 구절을 외우는데 모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내용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오곡(五穀)이 제대로 익지 못한 안타까움(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한 것을 의미함)을 자아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황은 보조국사가 9년 동안 소백산의 동가타암에서 좌선수도한 점과 종수라는 승려가 이 암자에 지눌의 시집이 있었다는 것을 들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지눌의 시집이 조선 중기까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김휴(金烋, 15971638)가 편찬한 해제 서목인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에도 이황의 글을 인용하여 지눌이 지은 책으로 수록되어 있다.
김군수(金君綏)가 지은 「보조국사비」에 지눌의 저술로 『결사문』, 『상당록(上堂錄』, 『법어(法語)』, 『가송(歌頌)』 각 1권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중 『가송』이 지눌의 시집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눌의 제자인 진가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의 저술인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에는 혜심이 지은 여러 시와 게송을 비롯하여 종과 암자에 붙인 명문과 기문, 그리고 「죽존자전(竹尊者傳)」 · 「빙도자전(氷道者傳)」 등의 가전체 문장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목우자시집』에도 비슷한 성격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지눌이 지은 시와 게송은 거의 전하지 않고 있는데, 유일하게 원묘국사 요세(了世, 11631245)의 비에 지눌이 지은 게송 1수가 전하고 있다. 지눌이 요세에게 정혜결사(定慧結社)에의 참여를 권유하면서 '물결이 어지러우니 달 드러나기 어렵고, 밤이 깊으니 등불 더욱 빛난다. 권하노니 그대는 마음 그릇을 바르게 하여, 감로의 물이 쏟아지지 않게 하라[波亂月難顯, 室深燈更光. 勸君整心器, 勿傾甘露漿.].'라는 게송을 보냈었다. 지눌은 정혜결사(수선결사)를 개창하고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실천한 수행자로도 유명하지,만 시집이 별도로 전해질 정도로 시와 게송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의 경지를 시와 게송으로 표현하는 선승의 수행 전통을 체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눌의 제자인 혜심과 혜심의 제자인 원감국사 충지(冲止, 1226~1293) 역시 시집 혹은 가송(歌頌)을 남기고 있는데, 수선결사의 승려들이 시와 게송을 중시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