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설화 ()

구비문학
작품
한 지역의 수호신에 대한 이야기.
이칭
이칭
서낭당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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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성황설화」는 한 지역의 수호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황 신앙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성(城)의 수호신을 믿는 신앙에서 시작되어 고려시대부터 전국적 범위의 관주도 제의로 뿌리는 내렸으며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음사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성황설화」는 자연물이나 충신, 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씨족 집단의 성씨 시조, 중국의 장수, 여자의 원혼 등이 신격으로 등장하여 보호, 치성 성취, 징치 등 신권을 발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의
한 지역의 수호신에 대한 이야기.
범주

「성황설화」 속 신격은 자연물이나 충신, 지방에 토착하고 있던 씨족 집단의 성씨 시조, 중국의 장수, 여자의 원혼 등으로 나타난다. 마을의 동신 신앙과 관련 속에서 존재하는데 이야기는 잊혀지고 제의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신격과 제의에 관련된 영험담까지 그 범주를 확대하면 그 제의를 지속하고자 하는 의의를 지닌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다.

성황 문화의 역사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성(城)을 방어 시설로 여기며 그 기능을 주관하는 신적 존재를 믿었는데, 그것이 성황 신앙의 시작이 되었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지방 호족들이 지역 수호신으로서의 성황신을 모시기 시작하였고, 고려 중엽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고을에 성황사가 설치되었다고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성황신은 양산군의 김인훈, 의성현의 김홍술, 밀양도호부의 손긍훈, 대흥현의 소정방 등 실존 인물이 신격화된 역사가 확인된다. 혹은 우탁과 관련된 팔령신인 자연물이나 울산 성황인 계변신(戒邊神) 등 초월자도 해당된다. 전쟁 중 성을 보호하는 업적을 세운 영웅이기도 하고, 기우제의 대상이나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거나 기복과 기풍의 신으로 여겨졌다.

고려시대의 성황은 산신과 함께 지역 토착 세력을 상징하며 그 존재를 과시하는 데 내세워졌던 것에 반해,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가 국교로 확립되는 과정에서 토착 신앙이 규제의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상당수가 부정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간주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토착 세력의 주도로 토착 신앙의 전통과 유교식 제의가 병립‧절충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의성 성황신 김홍술의 사례가 고을 사족에 의해 유교식 사우로 건립된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성황 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는 한국의 전통에서 소외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내용

신격을 성황사(城隍祠)에 모셔 두고 굿을 하는 문화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인데, 대체로 역사적으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인물들이 신격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경순왕으로 알려진 김부대왕, 단종대왕, 남이장군, 금성대군, 최영 장군 등이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위업을 달성한 인물이 신격으로 모셔진 경우도 있다. 특정한 곳에서는 성황사가 마을 단위의 당으로 바뀌면서 마을에서 위하는 신격으로 전환되는 예도 확인된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의 내력을 보면 범일국사 등이 주된 신격으로 모셔진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김유신이 복합적으로 모셔지는 예도 보인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에서는 범일국사 신화가 매우 주목할 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광감정에 의해서 국사성황신이 탄생하는 신이한 인물의 비범한 출생 내력을 보여준다. 또 일부 지역에서 성황신은 산신의 성격도 일부 겸하여 한 인물을 돕기도 하면서 인물담과 관련되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성황설화」는 성황신이 어떠한 영험을 보였으며, 어떻게 신격으로 받들여지게 되었는가 하는 좌정담을 핵심으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한 고장에서 특정 인물이 여러 각도에서 중첩되면서 모셔지는 사례도 있다. 성황신의 영험담 중 간단한 형태는 국사성황신을 모신 당에 하마를 하지 않고 가던 인물의 말발굽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핵심이다. 말이 발굽을 절어서 내리게 되는 변이형도 있다. 이렇게 「성황설화」는 좌정담을 핵심으로 하고, 이야기에 따라서는 당신을 갈라서 여러 당에 모시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기도 한다.

마을 단위의 성황당에는 여성 원혼이 신격화되는 이야기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다음은 주문진 지역의 진이 성황에 얽힌 이야기이다.

진이는 여성황이다. 그 미모가 출중하여 현감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아 뒷방에 갇혔다. 진이는 아이를 하나 낳고 자살하였다. 이후 풍파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생기자 진이의 원혼을 달래주는 제사가 시작되었다. 다음 원님이 이를 상부에 보고하여 동답을 얻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니 액운도 사라지고 재수도 좋아졌다. 아들이 없는 사람이 3년 동안 제사를 맡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한국구비문학대계』)

여기에서 주인공은 원혼의 성격이 두드러지고 그 내력담과 제의는 원혼을 달래기 위한 조치로 전승된다. 성황신의 역할은 보호, 치성 성취, 징치 등으로 나타난다.

전승 양상

성황신은 고려조부터 지역적 연관이 강한 관(官) 주도의 남성신에서 억울하게 죽은 민(民) 주도의 여성 신격까지 아우르면서, 개인적 기복은 물론 국가에 대한 예언까지 수행하는 민관 합동의 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설화에서 성황신은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고 소원을 들어주며 적절한 예우를 하지 않을 때는 징벌을 내림으로써 신앙적 힘을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머무는 성황당은 치성이나 제사의 대상이 되거나 예우를 해야 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숭배와 신앙은 그것을 주도하는 세력의 상징적 문화이자 정치‧사회적 역할도 담당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영향력은 점차 퇴색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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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한국종교사연구회, 『성황당과 성황제』(민속원, 1998)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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